▲ 서 헌 철 목사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Wittenberg University) 교회문에 붙인 사건이 있었던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 개혁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1517년 종교 개혁 운동이 있은 후 한동안은 루터의 생일인 11월 10일, 루터의 사망일인 2월 18일,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국회에서 루터가 제출한 최초의 개신교 신앙 고백서인 '아우그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의 발표일인 6월 25일 등도 종교 개혁일로 기념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일이 오늘날과 같이 10월 31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617년 종교 개혁 100주년을 맞이한 행사가 이날 거행되고부터였다. 그리고 10월 31일이 종교 개혁일로 확정, 반포된 것은 그보다 50년 뒤인 1667년 제후(諸候) 요한 게오르그 2세(John George II)가 루터의 활동 중심지였던 작센에서 이날을 종교 개혁일로 선포하면서 부터였다.

그 뒤로 종교 개혁일은 루터파 교회는 물론 모든 개신교 교회에서 종교 개혁의 정신을 기리는 날로 지켜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독일의 일부 루터파 교회들은 10월 31일을 종교 개혁일로, 그전 주일을 종교 개혁 주일 보다 길고 성대하게 지키고 있다(출처 : http://tip.daum.net/question/90861404)

교회역사가들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 만인 성자 교회의 문에 부착해다는 것에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루터는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농민전쟁으로 인한 분열은 가장 비참했다. 루터는 그의 복음은 무질서한 농민의 사회, 경제요구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혁명을 신께 대한 반역으로 봤다. 그 피해는 컸다. 그의 운동에 대한 독일하층민의 동정은 완전히 잃었다. 그의 평민 불신임과 함께 개혁은 군왕들이 할 일이라는 신념이 강해졌다. 루터 반대자들은 그 반란을 옛 교회에 대한 반란의 자연적 결과라 했다.(출처 : 류형기 편역. 기독교회사). 이때 독일 재침례파 농민 지도자 토마스 뮌쩌 (1490 ~ 1525) ] (Munzer Thomas) 등을 유토피아 공산주의의 대변자로 보고 농민들과 함께 처형하기에 이른다.(참고 : 홍치모 저. 종교개혁사) 그러나 독일농민군의 ‘12개조’ 주장을 보면, 그들이 꼭이 공산주의를 추종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물론 루터가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제후들)과 결탁 했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루터가 63세를 향유하고 생을 마감 한 후,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탄압한 독일교회”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히틀러의 나치정권의 도구로 전락, 충성맹세를 한 사례 등은 역사의 아이러니(irony)라 해야 할까?

그러나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스위스 농민군편에 참여, 전장에서 붙들려 ‘고해성사’등을 요구하는 로마 가톨릭 교황의 고해성사 요청 까지도 거부함으로 결국 시신이 4등분으로 조각나고 불에 태워져 그 재가 공중에 뿌려지기까지 당하였음에 그의 나이 47세였다. 따라서 '루터'와 동시대 인물로써, 비단 루터의 독일에 비해 국제적 영향력이나 힘에 비하면 극히 작은 나라인 스위스에서 올린 개혁의 깃발이지만 ‘츠빙글리’의 순교신앙이야 말로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종교개혁 일을 ‘츠빙글리’가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1516년 4월 또는 67개조의 공개토론일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토론을 개최했던 때 등에서 부터 찾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 2:15, 1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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