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마 4:18-22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고,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셨다. 험한 이 시대를 살면서 갑자기 이 기사가 생각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필이 달리는 데로 가볼 생각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갈릴리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중에 하나이다. 구약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 수 12:3, 13:27), 요한은 디베랴 바다(요 6:1). 누가는 바다라 하지 않고 게네사렛호수라 불렀다(눅 5:1). 남북 약 20km, 동서 약 12.5km 정도, 수면이 지중해면 보다 약 200m 낮은 이 깊숙한 바다를 게네사렛이라고 부른 것도 비파 소리 닮은 아름다운 파도소리 때문이라고 한다. 갈릴리의 아침은 삶의 희망을, 황혼의 광경은 영혼의 본향인 영원한 세계를 동경케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입을 모으지만 동시에 그 바다는 가끔은 폭풍과 거친 파도가 몰아치기도 하는 곳이다. 주님은 그런 해변에서 위대한 사역자들을 부르셨다.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던 주님이 그물치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그 전에도 만난 경험이 있다(요 1:35-42). 특히 요 1:40에는 두 사람 중 안드레의 이름은 나타나 있고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은 없지만 그는 분명히 요한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어업을 계속하다가 여기서 결정적인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부르심을 입은 이들은 모두 어부였다. 그들은 항상 흔들리는 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폭풍과 파도에 맞서야 했던 험한 사람들이었다. 험한 삶의 현장에서 함께 하신 주님의 위대한 부르심이 시작되었다.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 친히 오셔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 폭풍우속에 갇혀 있던 제자들의 배안에도 계셨고, 제자들이 파도와 힘겹게 싸우고 있을 때에도 기도하시던 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고, 또한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시국이 수상하고 힘들다. 좌우, 진보 보수를 떠나 정돈되지 않는 혼돈과 파도가 필자의 사유를 혼란케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데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운 혼돈 속에 우리의 오늘, 상황적으로는 타당한데 체감적으로는 그래서는 안되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우리의 시대정신, 이런 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하여 던지는 자조 섞인 흐느낌이다.

지나온 대통령들의 사진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단 한사람도 국민적 추앙을 받지 못하는 이 비극의 현시적 파도가 너무 힘들다. 이미 역사속으로 묻힌 그들을 이렇게 까지 부관참시를 해야 하는 것이며, 현재 생존해 있는 한 때의 지도자들을 이렇게 까지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런 근심과 염려의 파도와 폭풍처럼 달려드는 현실의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인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필자는 바로 이렇게 흔들리는 배와 같은 시대에 주와 더불어 일할 사람을 부르실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을 품는다. 주의 사람들은 항상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부르심과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갔던 경험도 우리 역사 현장에서 일었던 높은 파도와 폭풍이 휘몰아 칠 때같은 시련의 시기가 아니었는가? 저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간다고 했던가? 고난이 다가오면 필연적으로 주님을 찾게 된다. 이것이 연약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