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지난주 <기독교한국신문>은 구약성경 한글판 최초번역자 알렉산더 알바트 피터스 목사를 소개했다.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누가 최초로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피터스 목사가 최초로 한극판 구약성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역사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한국기독교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피터스 목사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가. 구약학 교수가 가르쳐 주지를 않아서인가. 아니면 한국기독교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인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최소한도 피터스 목사의 고마움을 알았다면, 피터스 목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아 동분서주한 박준서 박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피터스 목사는 <시편촬요>를 출간한 이후, 구약젼셔 번역과 개역구약성경 완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 한국인들에게 구약성경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공로자요, 우리민족과 한국교회의 은인이라는 사실 등등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부끄럽다.

또한 피터스 목사는 한국 기독교선교와 구약성경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기념비 하나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에 소재하고 있는 그의 묘소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흔한 묘비하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인 1300만명을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수치가 아닌가.

묘비 하나 없이 잡초와 잔디에 뒤 덥혀 무연고 묘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아낸 박준서 박사가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의 뜻을 모으기로 했다는 소식에 감사를 드린다. 그것도 큰 교회가 담당해서 좋은 묘비를 세우면 좋을 것을, 한국교회 전체가 피터스 목사의 뜻을 기리고, 잊혀진 그의 업적을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작은 정성을 모으겠다고 나섰다.

피터스 목사는 일본 식민지세력 밑에서 압제 당하는 한민족에게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알게 해 준 고마운 선교사 중 한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고난당하는 민족과 역사하셨다는 사실과 예언자들의 예언이 고난당하는 한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일본 식민지세력과 결탁된 일부 선교사들이 구약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한 상황에서의 피터스 목사의 구약성경 번역은 피압박민족에게는 큰 희망이었고, 새로운 나라로 인도하는 텍스트였다. 감사 할 따름이다.

러시아 정통 유대인인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가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도, 어쩌면 그가 러시아 정통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조선은 경건주의와 근본주의, 그리고 정통주의에 바탕을 두고 선교활동을 벌였던 영미선교사들이 주류였으며, 피터스 목사는 자연스럽게 이들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만난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돌아 왔다. 캠벨 여사는 서울생활이 얼마 되지를 않아 폐결핵에 걸려, 결혼생활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캠벨 여사는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피터스 목사는 아내 캠벨 여사를 추모해서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운동을 전개, 가난한 나라의 폐결핵 환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의료선교사였던 의사 에바 필드 여사와 재혼했다. 필드 여사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필드 여사 역시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필드 여사도 엘리자베스가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늦게나마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와 묘비를 세우고, 기념사업을 벌인다고 하니, 목사의 한사람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예장 합동총신측 총회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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