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 정 재 영 장로

「귀천」으로 널리 알려진 천상병 시인은 생전 남다른 일화가 많다. 마산고등학교와 서울 상대(중퇴)를 거친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가난한 삶을 살았다.

이 작품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가난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첫 연에서 가난이란 결코 행복을 제거하게 해주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의 가난은 버스값 정도라도 남아 있는 상대적인 가난이다, 이것은 산상보훈의 절대적 가난과 다르다. 후자는 이 작품과 달리 적신(赤身)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모든 것이 제거된 상황을 말한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목숨이라도 존재한다. 따라서 산상보훈 해당되는 가난은 오직 예수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 추론된다. 그런 면에서 산상보훈에 나오는 복(행복)있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소개의 말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행복은 비교급에 해당하는 말이다.

2연에서 가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가난이란 현재의 문제가 아닌, 내일에 대한 불안심리다. 가난은 부족함이 없어도 오는 심리현상이다. 개인마다 그릇이 달라, 넘치는 분량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넘치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버려지는 부분 즉 넘치는 것을 추구하는 소유욕이 바로 가난인 것이다. 시인은 현재 몇 푼이라도 있다. 따라서 오늘에 대한 가난이 아닌, 내일의 불안이 가난이라는 역설적 해석이다.

3연의 햇빛에서 가난의 본질을 살펴보게 된다. 직업처럼 늘 가난한 시인은 버스 값 정도 소유한 오늘의 가난을 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햇빛으로 은유한 우주적 존재로 가난이라는 문제를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4연의 키워드(key word)는 ‘그런대로 산 인생’이다. 넘치지 않았을 뿐이지 부족함이 없기에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이라는 말처럼, 가난이나 부자도 해석하는 눈높이로 그 여부를 해석해준다는 말이다. 찌든 가난을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더욱 그렇다. 행복과 부유함이 어떤 소유에서 생기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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