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가는 길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 문 현 미 시인
시인의 눈은 특별하다. 그에겐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기계나 도구가 없어도 대상에 깃든 세세한 것을 볼 수 있고 그 너머의 세계도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대상 속에 숨은 비의를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달과 해가 있는 곳에 갈 수 있고, 새로운 별을 발견하기도 한다.

유시인의 눈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가 닿았다. 세한도는 추사가 1840년 유배지 제주도에서 모든 걸 잃고 고립되어 있었을 때 애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그림이다. 권력보다 의리를 택한 제자에게 주려고 거친 종이 세 장을 이어 붙여 설원에 사람 없는 토담집 한 채, 그 집을 둘러 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소박한 수묵화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국보 180호로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일컫는다. 시인은 세한도에서 겉으로 보이는 풍경보다는 추사의 마음 속을 천착하였다. 그의 처연한 심경, 외롭고 힘든 처지를 안으로 녹이고 걸러낸 절제된 내면을 붙든 것이다.

세한도 가는 길은 천명이 일러 준 길이다. 하늘의 명령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시인은 그런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라 “오십령 고개부터”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歲寒의 길 “추사체로 뻗친 길”이라고 한다. 이런 탁월한 비유가 시의 제목과 어우러져 멋진 시가 탄생한다. 시인은 세한행 길이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이며, 이 길을 가기 위해선 “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 가라”시는 준엄한 명령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을 흘려서라도 “붉게붉게” 가라는 것이니 시적 화자의 강인한 의지와 순종의 자세가 동시에 돌올하게 드러난다. 이 시는 시 전체를 관류하는 서정의 축이 미학적 긴장을 줄곧 유지하면서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2018년 새해, 찬란한 태양이 떠 올랐다.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으리라. 시에서 보여주는 매운 얼음 정신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 내면의 자장이 한결 뜨거워지고 더욱 단단해지리라. 또한 추사가 세한도에 찍은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 즉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도 되새겨 보자. 시류, 권력, 명예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섬기는 삶, 사람의 향기 그윽한 품과 격을 지닌 삶이 기다릴 것이니.

백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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