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99주년을 맞아 <기독교사상 3월호>는 ‘특집-신문, 재판, 소설 속의 3•1운동’을 통해 자주 독립을 위해 애쓴 그들의 애국적 생애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먼저 ‘중국 신문 <익세보>에 실린 3•1운동 관련 보도’를 다뤘다. <익세보>는 1915년 10월 10일 천주교 천진교구 부주교인 뇌명원인 천진에서 창간한 일간지로 3•1운동의 실상을 전달하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을지지 성원하는 데 앞장선 신문이다.

보도에는 “서울, 15일 각 상점은 여전히 휴업상태이다. 우편물 전달도 지극히 어렵다. 이렇게 보면 상인들은 독립운동에 열중할 뿐 이익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이런 한국 민족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며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 있게 다뤘다.

특히 보도에 등장하는 김선두는 평양 서문밖교회(장로교) 목사로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을 중심으로 거사의 주동적 역할을 하다 툭옥된 인물이며, 강규찬은 평양 산정현교회(장로교) 담임 목사로 김선두 목사와 마찬가지로 평양 일대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일로 2년간 복역했다.

특집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을 비롯해 목원대학교 표언복 명예교수, 미도중국선교연구소 문영걸 소장이 △재판 속의 3•1운동 △중국 유이민 소설속의 3•1운동 △중국신문 속의 3•1운동 등의 각각의 제목으로 참여했다.

김승태 소장은 무단통치하의 사법제도와 3•1운동 후의 재판과정,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일제가 3•1운동 주동자들과 과격 행동자들을 재판에 회부한 것은 이른바 합법을 가장한 요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 뒤, “더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헌병경찰과 군대에 의해 시위 현장에서 학살되거나 태형과 구타, 고문을 당하여 희생됐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3•1운동에는 연인원 220만 명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 의 10% 이상이 참여한 것”이라면서 “여기에서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지도자와 주동자로서 참여하여 민족의 수난을 동참했다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표언복 명예교수는 유이민 소설이 다른 소설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표 명예교수는 “3•1운동을 과거의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후일담 소설들은 여러 가지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면서 “한결 열악해진 객관적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항일 의지를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식의 소산인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항일 의지를 포기한 채 전향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혹은 그 가족의 비극을 드러내 그들이 겪는 수난의 숭고성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항일 의지를 위축시키는 역기능으로 작용 할 수도 있다”면서 “3•1운동 전 이광수의 <무정>에서 벌써 항일운동 노선의 분열상이 노출되어 있지만, 3•1운동 이후의 소설에서도 이 같은 소선상의 분열이나 파쟁이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망명한 유이민들의 항일투쟁의 실상을 제재로 삼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은 식민죽의 폭력의 실상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던 민족공동체의 수난에 대한 증언이며, 3•1운동 이후의 정세와 세태변화를 반영한 소중한 성과”라고 꼬집었다.

문영걸 소장은 중국 신문인 순천일보, 민국일보, 익세보, 신보, 경보 등 3•1운동에 대한 성원을 설명하고, 중국 5•4운동 지도자들이 평가하는 3•1운동에 대해 밝혔다.

문 소장은 “5•4운동의 지도자들은 3•1운동의 발전을 주시하면서 한국인들의 독립 투쟁에 감탄하며 성원을 보냈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 깊은 자극을 받았으며, 일제의 잔인한 제국주의 야먕을 분명히 확인했다”면서 “동시에 열강들의 침탈을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동일한 삶의 자리에 처해 있다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3•1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결국 5•4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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