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21세의 황제는 곧 바로 내전에 휘말려서 주변 상황에 대해서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루터를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망설이게 되었다. 5월 12일,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과 네델란드 국경을 넘어섰고, 합스부르그 왕국을 공격했다. 프리드리히, 브란데부르그의 알브레흐트, 헤세의 필립 등 독일지역 군주들은 5월 25일 회의가 폐회되기 이전에 모두 떠났다. 5월 26일, 황제는 대성당에서 거행된 미사가 끝이 난 후에, 남아있던 고위 층과 협의하였다. 다소 주변 나라들의 상태가 파악이 되자, 다음 날 루터가 이단이라는 문서에 서명하여 공표했다. 루터는 제국의회에서 법을 어긴 자가 되었고, 그것도 아주 나쁜 사형죄에 해당하는 자로 취급되었다.

보름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할머니 집에 들른 루터 일행을 일단의 무리가 공격했다. 루터의 동료들은 숲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졌다. 그들이 숙소를 공격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루터는 피할 수 있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루터는 아제나흐 근처 숲에 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몰래 숨어들었다.

유명한 조각가이자 화가로서, 루터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알프레드 뒤러가 말한 바와 같이, “그 때 만일 루터가 죽었더라면, 누가 거룩한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할 수 있겠는가?”

로마 교황청과 함께 세속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 챨스 5세로부터 루터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그 당시 정치는 기독교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기에, 이단으로 출교되는 것이나 사형에 처하는 것 등은 모두 다 신성로마 제국의 소관사항이었다. 기독교 교회가 독립적인 권리와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세속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야만 했던 시대였다.

3. 보름스의회와 주요 사건들

필자는 감히 “종교개혁의 승리”라고 하는 제목을 여기 보름스 의회에서부터 사용했다. 보름스의회를 기점으로 종교개혁의 승리가 드러나게 되었음에 주목하게 된다. 비록 루터는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지만, 결코 그의 주장을 제거할 사람이 없었다. 루터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조그만 도시 비텐베르그에서 새로운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곧, 미사를 비롯한 성례주의가 폐지되고 개혁교회의 예배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후로, 기독교 역사는 새롭게 바뀌고 말았다.

1518년 4월 26일 도미니크파 토마스 드 비오 (다른 이름으로는 추기경 카예탄)가 교황의 사절로 아우구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하도록 선임됨5월 교황 레오 10세의 지휘 하에 루터의 신학사상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모임.

6월 루터가 “출교의 권세에 대하여”를 설교함. 8월에 출판함.

7월 아우구스부르그 카예탄을 통해서 루터에 대항하는 문서가 루터에게 전달됨.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고문 게오르그 스팔라틴과 루터가 향후 대책을 상의함

8월5일 막시밀리안 황제가 루터를 이단으로 공격함. 황제는 루터에게 교회에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명령함.

8월 8일 루터가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아우구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함. 자신의 문제를 로마가 아니라 독일 내에서 협의할 것을 요청한 것임.

8월 23일 교황 레오 10세가 카예탄에게 루터를 압송하여 로마로 데려올 것을 명령함

8월 말 루터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입장을 발표함. Prierias의 『대화』에 반대하여 루터가 박문을 제시함.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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