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던 때에 유대나라에는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종파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헤롯당 등 정치와 종교를 혼합한 종교정치 권력이 형성 되어 있던 시기다. 당시 제사장은 유대 종교의 고위직이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그룹이다. 또한 레위인은 다른 직업은 가지지 않고 오직 성전 유지 관리하기 위해 각종 직분을 수행하는 선택받은 지파다. 사마리아인 하면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침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앗수르 백성을 이주시킨 것과(왕하17:3이하) 마게도냐 알렉산더대왕이 침공해 사마리아인을 축출하고 자기국민을 이주 시켜 자연 혼혈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고 혼인도 금했다. 사마리아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만났을 때에 아무도 보지 않으니 그냥 지나쳤다고 했다. 겉은 거룩한 제사장이요 선택받은 레위 지파이지만 속은 세속적인 사마리인보다 더 못한 심성과 비양심적인 행동을 지적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나 응급상황이 벌어진 자에게 달려가 그를 구해주었다. 그는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진 돈을 그를 위해 다 소비하고 더 들면 돌아오다가 갚겠다고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국교회를 이룬 목회자와 성도들은 어디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사회에는 입에 담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장애인 자녀를 빌미로 도움을 요청해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유입되는 돈을 모아 호사스럽게 생활한 파렴치한이 아버지가 있는 반면, 자신들의 삶에 방해가 된다하여 자녀를 살해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부모의 돈을 빼앗아가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친지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살해 방화하는 흉측한 아들이 있는가 하면, 어린 자녀를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굶주려 죽게 하는 친 아버지와 계모가 있으며, 늙은 부모를 외국에 대려가 버리고 오는 자녀들도 있는 시대다.

사회는 온통 강도 만난 자들이 수도 없이 우리 눈앞에 펼쳐 있다. 이러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일들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인적 자원 중 먼저 목회자들의 인식이 어떤지 궁금하다. 물론 성경의 제사장은 오늘의 목회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현실 기독교의 세계에는 목회자는 성도들을 지도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양 무리들에게 꼴을 먹이는 목자의 사명도 있다고 본다. 지도자적 위에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목회자들의 말은 교회 원들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가르치는 자라고 했다. 오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강력 사건 중 가정 파괴와 윤리와 도덕적으로 어그러진 일들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이 어떤지가 중요하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 말세니까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일어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 우리들은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 하면서 세속적인 일에 대해 못 본 척, 안 본 척, 못 들은 척, 해버리면 그만이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사회의 일련의 일들은 바로 사회를 계도하고 사회 속에서 등불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교회 주변을 샅샅이 살펴 범죄가 일어날 만한 단초를 미리 막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할 몫임을 성도들에게 계도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너무 바쁘다. 자신들의 이익과 종교 권력과 자리 쟁취에는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드려도 사회의 어려운 일에는 눈을 감고 있지나 않은지 매우 염려스럽다.

주일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정직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에서의 생활 그리고 행동은 어떤지 점검해야 한다.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에 나와 무관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요 우리의 이웃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아니 내 가정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어떤가? 우리들은 교회를 바라보는 눈은 사랑스럽게 바라보지만 내가살고 있는 주변에 일어난 특히 어려운 일, 끔찍한 일, 홀로 살고 있는 노인들, 병든 자들, 지체부자유한 자들, 가난한자들,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보육원을 바라보는 눈이 차갑지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눈과 양심은 오늘의 교회가 가져야 할 눈과 양심이다. 제사장이 지나쳤고, 레위인도 지나쳤다. 그들은 종교지도자, 선택받은 자들이다. 한국교회여 이들을 닮지 말고 사마리아인을 닮자.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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