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누이동생 다말이 있었다. 이 다말을 배다른 큰 오라비 암논이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자, 압살롬은 졸개들을 시켜 암논을 척살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어찌 이런 일이! 다윗 집안의 비극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고, 막을 수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윗은 아들이 저지른 천인공로할 일을 모른 체했다. 원통하고 치욕스런 일을 당한 다말에 대해서 어떻게 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후계자를 보호하고 싶은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그 시대 나라가 강자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 있다. 강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약자에게는 무자비한 나라는 성공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롬 15:1)이라고 했다. 성서가 항상 약자에 대해 관심을 표현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이 자기만족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사회 제도를 보는 관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회 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목사의 설교가 진정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데는 대부분이 공감하면서도 약자에게 억압적인 사회 제도를 취급할 때는 약자보다는 나라를 앞세운 강자 편에 서는 경향이다. 아마도 ‘번영’ ‘승리’ ‘성공’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어린 예수를 향해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했다. 복음은 흥해야 하고, 율법은 쇠해야 한다. 약한 자를 보살피는 복음은 흥해야 하지만, 약한 자를 억압하는 율법은 소멸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는 유별나게 ‘성공’에 목을 맨다. 하지만 약자의 탄식을 외면하고 성공한 지도자도 없고, 성공한 나라도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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