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오늘 한국교회는 성과주의, 성장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아니 성과주의와 성공주의를 넘어 이를 우상화시켰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의 물질주의와 성과주의는 아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은 물질주의에 빠져 사탄의 꼬임에 넘어갔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영생불멸하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물질주의에 빠진 나머지 바벨탑을 쌓기에 급급하다. 교회는 성과를 내야만, 교회를 성장시켜야만,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성과주의에 매몰돼 우는 자들의 아픔을 모른다.

사람은 말하는 존재이다. 이웃과 말을 통해서 교류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도 말(기도)로 한다. 하나님과의 교류는 물질로 하지 않는다. 기도로 교류하고, 교인들과의 교류도 신앙으로 하며, 세상에서는 행동으로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물질주의 아니 성과주의에 빠진 나머지 물질로 소통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그것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돈이 있어야 교회도 다니고,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말(기도)로 하나님과 교류하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하나님과 교류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 우상과의 교류는 돈과 물질이 필요하다. 무당을 데려다가 ‘푸닥거리’를 하고서 복채를 낸다. 점을 보고 복채를 낸다. 오늘 한국교회도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드려야 한다. 일부 목회자들은 “헌금의 액수가 축복의 척도이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말로 이웃과 교류한다. 부부간에도 말로 사랑을 나눈다. 말로 소통하지 않는 사회는 삭막하다. 부부관계도 금이 간다. 가정이 파괴된다. 말 때문에 이웃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한다. 우리속담에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보면, 이웃과의 교류가 단절돼 사람들은 우물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말이 통하는 곳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날 리가 없다.

송파에서 일어난 3모녀 사건을 비롯해 증평의 모자사건, 혼자 사는 독거노인들의 죽음 등등은 이웃과의 단절이 불러온 사건이다. 사람은 가난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해서 죽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웃과 소통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 등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끊는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로서 최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나, 증평 모녀사건, 독거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공권력이나, 이웃들이 조금만 관심과 대화를 가졌더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목사인 필자는 스스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하나님과의 대화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지만, 이웃을 기도여야 한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나만을 위한 기도, 가족에 한정된 기도이다. 오늘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소통,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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