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진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 정 재 영 장로
박용주(1973년 광주 출생)는 1988년 4월에 쓴 이 시로 전남대 용평편집위원회 주관한 1988년 '5월 문학상'을 수상한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15살이었고,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중학생이라는 나이에서 천재성을 보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이와 관계없는 미학성을 가지고 있다.

‘오월 함성’의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과 연결한 지상의 목련과 천상의 목련을 융합한 시적 상상은 메타포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란 3자의 위치에서 상상 언어도 높이 사지만 당사자의 고백만큼 절절한 감성을 전달 받기는 쉽지 않다. 박용주 시인이 겪었던 아픔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겨져 있다. 시집에 나오는 아버지와 망월동 이야기나 운동권이었던 매형에게 시집을 가는 누이는 그의 작품이 광주 5월 특별한 사건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죽음은 누구나 목련이 지는 아쉬움과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다. 그런 일을 일반 일기처럼 옮겨놓아도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하늘같은 존재의 상실에서 오는 사춘기 작품은 문학의 목적론인 순수한 통징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독자가 적용할 때(동일시) 얼마나 비통한 감정에 빠져들겠는가.

형상화라는 말은 체험에서 생기는 것이다. 문학은 결국 체험의 발로다. 이때 체험은 꼭 경험을 말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비극적 요소를 위해 일부러 비참한 지경을 만들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윤동주, 이육사, 만해 등처럼 타의에 의해서 절망적인 나락에 떨어지는 상황은 분명히 중요한 시적 오브제가 된다. 그들의 작품은 사회적 구조와 환경적 갈등에서 초래한 것이다. 이런 작품을 참여문학으로 부른다. 간혹 목적에 매달려 미학적 한계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순수문학이라는 존재의 내재의 갈등을 다룬 작품과 굳이 차별화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경우나 사회적 조건은 개인적인 내면세계와 연계되기 마련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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