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해설
기독교가 타락하면, 사회와 정치도 타락한다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의 선교모델(2)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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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5  12: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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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의 종교적 책임 윤리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세계화 시대, 글로벌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도 종교의 책임과 윤리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종교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역할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문제제기는 강대국들이 금융자본을 제3세계 국가에 빌려줘, 이들 나라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 지고, 부자들을 더 큰 부자가 되는 오늘의 세계 상황에서, 성서에 바탕을 둔 이성적 합리성에 기초한 종교의 역할, 성서적 경제 질서(나눔)가 중요하다는 것을 대변한다.

특히 상업주의로 대변되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에 바쁜 한국개신교의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이런 상황에서는 종교의 이성적, 합리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종교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낳지 않느냐”고 말한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의 윤리와 경제적 윤리, 정치적 윤리를 강하게 제기하기 나섰다. 윤리적 논거를 통해 일부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오늘의 왜곡된 종교적 질서와 경제적 질서, 정치적 질서를 치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한국개신교는 유럽의 자유방임주의 시대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것은 종교가 경제적,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 신학적, 철학적 논거를 배제하고 있는데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한국개신교의 중대형교회들은 종교인의 세금부과에 대해서 철저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작은 교회들도 세금부과로 인해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대형교회의 입장에 서서 종교인 과세를 반대한다.

한국교회는 수 년 동안 종교인 과세를 둘러싸고, 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어 왔고, 지금도 빚고 있다. 19세기 자유방임주의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정치적, 종교적, 윤리적, 도덕적인 간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 이래, 국가권력과 함께 해 왔다. 국가권력을 등에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천상의 삶’을 내세워 괴롭혔다. 과거 한국교회 역시 독재정권을 등에 업고,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종교가 권력에 깊숙이 개입하면, 종교도, 권력도 망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존 로크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가 성경적 경제 질서를 파괴하는데 중심에 서 있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적 윤리, 종교적 윤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자들은 “성경적 경제 질서가 깨지면, ‘부익부’, ‘빈익빈’현상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에 이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세계교회는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침묵하고, 성경적 경제 질서에서 이탈하면서, 경제적 약자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유럽의 교회당은 이슬람 사원 또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대표되는 향락업소로 넘어갔다. 지금도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다. 성경적 경제 질서는 한마디로 ‘나눔’이며, ‘섬김’이다.

이런 상황에 이른 세계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교리와 제도에 갇혀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맘몬의 상징인 바벨탑을 계속 쌓는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교파 간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중세시대에는 신학과 기독교적 윤리가 사회적, 경제적 삶을 규정했다. 인간의 종교적 구원,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이 궁극적 목표였다.

때문에 당시 유럽인들은 지상에서의 삶, 그것을 위한 질서는 잠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래도, 저래도 좋았다. 도덕적, 종교적 질서가 세속적인 삶이나, 경제활동보다 중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경제적 사고는 종교적 질서, 종교적 가치와 윤리, 그리고 관습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 같은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선교모델이 되었으며, 피선교지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중세시대, 콜럼버스의 세계화 당시에 머물러 있다는 결론이다.

“‘지상의 삶’도 ‘천상의 삶’ 만큼이나 중요하다”
상업자본주의 길들여져 ‘교회성장론’에 매몰된 한국교회

지상의 삶, 천상의 삶과 함께 중요

유럽의 이러한 사고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민혁명,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럽인들은 과거 전통의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천상을 향한 삶에서, 지상적이고 현실적인 삶으로 방향을 틀었다. 형이상학적인 기도의 세계서, 현실적인 기도와, 노동의 세계로 나와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행동했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개혁이었으며, 성서의 예수님 ‘삶의 자리’,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계역사와 한국역사에서 종교가 권력에 편승되면, 가장 먼저, 그 종교와 사회, 그리고 국가가 타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 하나님 대신 맘몬(시장)으로 대치시킨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를 성장시켜온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모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상업주의 ‘교회성장론에 빠져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기도문대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권력의 시녀노력을 했다는 비난을 받아왔고,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옷을 갈아입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과거 잘못된 이명박 전대통령과 박근혜 전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던 경기도의 한 목사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권과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줄을 대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이것이 비단 이 목사 뿐 이겠는가. 청와대의 초청을 받기 위해서 수억원의 선거자금을 뿌리는 모단체의 대표회장 선거를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한마디로 창피하다 못해 비참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는 이제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필요한 돈을 교인들로부터 얻어내기 위하여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중세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천상의 삶’을 강조한다. 또 자신의 명예와 행동 없는 기도를 늘어놓으며, 맘몬을 외친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신의 자리에 돈이 등장했다. 교회당의 십자가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쌓는다. 그리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교회는 아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됐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선포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그런데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몇몇 목회자들이 독차지 해 버렸다.

호화로운 교회당에 신을 가두고, 천상의 삶(구원, 하늘나라, 천당)을 교인들에게 강조한다. 더 이상 교회에는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한마디로 교인들의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를 박탈해 버렸다. 그렇다보니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장애인 등의 교인들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 한마디로 가나안 교인이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 또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교회를 중상모략해 교인들을 빼앗는 ‘교인쟁탈전’도 벌어진다.

고 손규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세계화 시대 기독교의 두 멀굴>(2007, 도서출판 한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창시자인 루터는 그의 소명을 직업과 결합시킴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경제적 삶을 포괄하는 삶 자체가 구원을 위한 소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지상에서의 공로가 천상의 삶을 위한 전제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삶이 천상에서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하며, 직업은 신이 준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라는 것이다.

칼뱅도 자신의 저서 <예정론>에서 “직업적 삶의 성공은 곧 종교적 예정의 징표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구원이 예정되어 있거나,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상에서의 삶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회 강단에서는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천상의 삶만을 외쳐 댄다. 천상의 삶, 영혼구원은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과 육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영이 중요한 만큼, 육도 중요하다.

일부 교인들은 지상에서의 진실된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직업도, 교회도 버리고 신앙생활을 한다. 한마디로 주일날 교회를 빠지지 않고, 헌금만 많이 드리면 천상의 삶을 위한 티켓을 따 놓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헌금의 액수가 하나님나라의 척도가 되었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전혀 다른 것이 없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믿음과 인격 그리고 신앙생활이 아니다. 헌금의 액수이다. 돈이 있어야 장로도, 안수집사도, 권사도 된다. 그것은 처음 한국교회에 들어온 영미 선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훈련시켰다.

종교가 타락하면 정치도 타락

망해가는 이씨조선 말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창하며, 일본식민지세력과 야합,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고,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그리고 정치에 간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서 추방했다. 대신 평양집회, 원산집회 등을 열어 한민족에게 ‘영적각성’, ‘추상적인 영혼구원’, ‘형이상학적인 천당’ 등 ‘천상의 삶’을 외치며, 한민족을 예수님의 ‘삶의 현장’과 유리시켰다.

그리고 망해가는 정권, 일본 식민지세력을 등에 업고, 선교파송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것은 당시 선교사였던 알렌과 언더우드, 스티븐슨 등의 상행위에 잘 나타나 있다. 전체의 선교사들이 다 그랬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수의 선교사가 중세시대 이전의 사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선교사들의 공과는 있었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권력 밑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었다. 또한 한글 성경을 보급, 천민들과 여성들의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깨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봉건주의 체제 하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여성들의 민권회복에 앞장, 평등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했다.

당시 여성들과 천민들은 교회만큼 살맛나는 곳이 없었다. 또한 지식인들 역시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모토를 마련했다. 독립운동은 선교사들과는 무관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천지창조에 이어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고난당하던 히브리인들의 해방운동으로 시작하는 구약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바울의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한민족의 일본식민지세력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들에 의해 주창된 일본 식민지세력의 정교분리정책이었다.

또한 이것은 ‘천상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중세교회 이전 유럽교회의 식민지적 지배이데올로기의 선교모델이었다. 이 선교모델은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고, 한국교회는 제3세계 국가에 교파주의를 그대로 이식시키고 있다. 분명 칼뱅의 예정론에 나타난 삼단논법은 자본주의를 발현하게 한 개신교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한마디로 장로교회를 상업주의에 길들여진 부자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부자종교가 된 나머지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에 사로잡혀 분열과 갈등을 계속 일으켰다.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켜버렸다.

오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연합, 한국교회총연합 등이 하나 되지 못하는데도, 그 중심에 장로교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들이 한국교회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한국교회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종교개혁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해온 ‘관용의 정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 다툼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고,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마음대로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을 교리화시켜,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칼뱅주의적 예정론의 선택의 확실성을 신자의 근면성, 세계 내적 금욕주의.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축적된 부에 두고 있다. 그렇다 칼뱅의 예정론은 성공적인 직업 활동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를 악용하여 가난하고 천박한 제3세계 국민들에게 그대로 이식시켜, 천상의 하나님나라를 외치게 한다. 그렇다 보니 목회자들의 의식은 이웃교회보다 큰 교회를 건축하고, 이웃교회 교인이라도 빼앗아 교회를 성장시켜야만 하는 ‘교회성장론’에 몰입해야만 했다.

경제활동의 기초 종교적 논거

세상의 경제활동의 기초가 곧 종교적 논거와 함께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 경제활동(자상의 삶)과 천상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천상의 삶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에 근본주의, 정통주의, 자유주의, 경건주의 신학으로 뿌리를 내리게 했다. 여기에 반하는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논거는, 다툼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분열이라고 보기보다는 교권에 의한 분열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동의한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의 기독교의 목표는 내적, 외적 해방인 종교적 자유, 정치적 자유이다.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해방은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지향한다. 자유주의적 경제는 자연스럽게 도덕철학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윤리사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세계는 정치적 자유보다도, 종교가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왔고, 예속되어 있다. 그리고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혜택을 누리며, 상업주의의 ‘교회성장론’에 빠졌다.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성장론에 영향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교회가 촛불정국에서 잘못된 정권을 비호하며, 국민이 직접선거에 의해서 뽑은 대통령을 부정하면서, 강대국의 국기를 흔들며, 그 나라의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한국교회가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를 망각한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영미의 상업자본주의적 신학을 받아들인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 해외선교부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조선 말 한국에 온 선교사 대부분은 정규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아니라, 비정규과정을 공부한 사람들이다”면서, “때문에 이들은 영미의 정통신학과 경건신학,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을 전파하는데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보니 영미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피압박민족에게 ‘천상의 삶’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권력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에서 이탈한 것이다. 때문에 경제윤리, 종교윤리(기독교윤리)라는 용어들이 등장했다. 유럽의 중세이전에 뿌리 깊게 박힌 유일신 사상에 크게 대치된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이 충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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