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해설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인간 사이의 화해와 인정,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실종된 선교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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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0  09: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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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독차지한 한국교회

유럽의 교파주의가 한국에 그대로 이식됐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350여개의 교파가 존재하며, 선교운동을 경쟁적으로 벌이는 이유도, 상업주의의 ‘교회성장론’에 길들여져 신의 자리에 맘몬으로 대치시킨 결과이다. 오늘 한국장로교만 해도 3백여개가 넘는다. 보수적인 연합단체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분열돼, 끊임없는 다툼을 벌이며, 자신들이 만든 정관과 법마저도, 지키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개신교회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유리된 채, 유럽인들에 맞게 포장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외쳐 왔고, 외치고 있다.
여러 모습으로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참담함을 보이면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문제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데 있다.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로 물고 뜯는다. 교회 분쟁으로 인해 교회가 해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다툼이 끊이지를 않는 연합단체와 교단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인정,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자세는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유럽 기독교가 그랬듯이 한국교회도, 서로 죽이고, 죽이는 혈투만 있다. 그래서 홉즈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늑대’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그렇다 인간들은 자기의 생존보존을 위해서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 이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헤치기도 하고, 타인의 재산을 탈취하기도 한다. 서구의 역사는 인간과 인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러한 사악한 인간성을 순화하기 위해서 종교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역기능을 작용하고 있다.

에덤 스미스는 “인간 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들을 파괴하는데서 온다”고 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해석하면,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진다는 것이다. 계시종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제도화되고, 그 주도세력은 성직자이다. 성직자들이 권력투쟁에 몰입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성직자들의 교리를 내세운 권력투쟁의 실체가 아닌가.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법마저도 지키기 않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이며, 성직자이다. 이는 오늘 세습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형교회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의 교단이 세습방지법을 만들어 놓고서도, 이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분열과 갈등, 혈전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의 승리주의, 성장주의, 맘몬주의, 공로주의에 빠진 결과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인 참 평화와 사랑, 화해와 섬김의 정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교회가 내 교회, 우리교회, 개인주의, 집단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맘몬 예배당을 건축하고 기독교를 율법과 성전종교로 만들어 버렸고, 예수님을 교리와 제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집단의식과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참 평화를 얻고, 선교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구원은 타락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성서는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한다고 전한다. 때문에 선교는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에로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연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그 사이를 가로막는 법이 되었든,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 구조악을 발견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부조리한 체제나, 사회에 도전할 수밖에 없고, 도전해 왔다. 최근 한국교회가 동성애 등에 맞서 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타자를 위한 교회, 그리스도의 삶 절실한 사회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민족적정체성 회복하는 선교모델 전환해야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궁극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선교의 방향전환과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운동이다. 선교의 과제는 상대적인 것이고, 지나갈 것이며, 인간이 만든 체제 따위를 절대시 하고, 그것에서 보상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새 세계(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맘몬주의와 공로주의, 그리고 성공주의와 승리주의에 매몰돼, 다툼과 분열의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하늘의 축복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선교전략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우리의 상황에서 창의적이며, 책임적인 선교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선교전략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펼친 선교에 머물러 진일보하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국내외에서 시행되고 있는 선교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목사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보고, “미국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선교의 목적에서 크게 이탈했다”고(아서 브라운 저, <극동의 지배> 지적했다.

선교, 인간구원의 목적으로 한다

선교는 인간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지구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한 신(하나님)을 믿는다. 그것은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들도, 잘난 교단의 교인들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같은 주기도문을 외우며, 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부르면서 한국교회가 분열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혈전을 벌일 이유도 전혀 없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이웃교회와 교단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화합과 일치를 향한 행진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로교단만 가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감리교단만 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한국교회 전체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면서, 이웃들과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남한 민족만 가는 곳도 아니다. 북한 민족도 함께 가야 하는 곳이다. 아니 230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과 세계민족이 함께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져 개인주의적이며, 집단이기주의적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개별적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들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이란 기도문에 희망을 걸고 신대륙으로 향해 항해했다.

그러나 이 희망은 5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평가해 보면,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경배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다우존스 주가지수이다. 찬양과 존귀의 대상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회주의나, 회교국가에서도 좋아하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것은 자본주의 보편문명이 되었다. 콜럼버스 미대륙 500년을 맞아 <슈피겔> 기자는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한 것이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그램린의 지도자들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
이 기고문은 신을 호화로운 교회당에 가두고,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하는 한국개신교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다툼은 하나님 대신 우상, 맘몬으로 대치시킨 결과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한국교회 연합단체와 교회들은 분열과 갈등과 분쟁에 휩싸여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고소고발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킨 나머지 성직자들은 타락하여 교회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했다. 이는 교회의 신뢰성으로 이어졌으며,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더 이상을 교회를 찾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인 한국개신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서로 돌아가 성서의 경제사상인 나눔과 섬김의 선교을 새롭게 정립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사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남반구 80%의 인구는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의 실체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은 1천년동안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자신들의 삶을 파괴당했던 유대인,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떠돌이들의 인간다운 삶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질서의 실현을 위해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즉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유대 땅에서 시작되어 세계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전망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새로운 사회질서와 경제질서는 한마디로 ‘나눔’과 ‘섬김’, 그리고 사랑과 평화였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함으로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권세를 부리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크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공동번역 마 20:24-28)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이 설교는 정화되어 맑은 귀를 가진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또 구원받은 자만이 나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 이것은 성서의 경제관이고, 선교의 방향이다. 그리고 예언자적 전통과 예수님의 전통이다. 성서의 경제질서는 아침 일찍 와서 8시간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 같이 대접을 받는 것이다.(마태복음 20장 1-16절) 능력 있는 사람이나, 능력 없는 사람이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모두가 삶에 필요한 것만큼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경제 질서이며, 기독교의 가치이고, 교회들이 세계 곳곳에서 선교하는 목적이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지고, 맘몬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예수님은 변방 갈릴리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의 선교 일성인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얻게 된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저희 것이다”(누가복음 6장20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블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누가복음 1장52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28절)고 했다. 그리고 부자들을 향해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태복음 10장25절)고 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을 차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돌입해서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를 대상으로 돈 장사를 해서 부유해지고,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이 돈으로 고리대금업 등을 해 부자가 된다. 한마디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금융자본이 가난한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마술쟁이의 마술봉으로 만들어 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해,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고, 교인들을 불러 모은다. 교인의 수는 곧 부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교인들은 목회자를 교회의 사이즈로 평가하고, 돈이 있어야 총회장도 되고, 노회장도 되기 때문이다. 또 돈이 있어야 장로도, 권사도, 안수집사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선교도, 봉사도 할 수 있다.

믿음과 신앙이 돈독하다고 해서 직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돈이 최고이고,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신앙의 척도는 믿음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이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보편문명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가져다가 준 추상적이고, 감사적인 하나님 나라, 천상의 삶을 외친 결과물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가로채 버린 것이다. 아담스미스는 “인간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들을 파괴한데서 온다”고 했다. 교회도 질서가 파괴되면서, 교회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분열과 다툼만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혈전을 벌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보라. 명성교회와 서울교회를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셰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져버렸다. 바울도 질서가 파괴된 교회를 향해 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했다. 인간이 무질서하고,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분열과 갈등, 파괴와 무질서를 여기에서 멈추고, 자연과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를 위한 행진을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내려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는 율법과 자신들이 만든 법 위에 군림한다, 하나님을 율법과 성전에 가두고, 마음대로 이용한다. 하나님은 언제부터인가 마술쟁이의 마술봉이 되었다.

하나님, 약함(십자가)으로 돕는다

오늘날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라면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고의 능력도, 거룩한 실재도, 초월하신 인격신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신이다. 그는 전능성으로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다. 약함(십자가)으로 우리를 돕는다. 전통적 기독교 논리에 기초한 전지전능하신 신, 서구 기독교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식민주의의 신이 아니다. 중세 성직자의 신도 아니며, 개신교 신학자와 중대형교회 목사들만의 신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나머지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현대사회에서의 왜곡을 극복하고, 상호간의 장점들을 발견, 서로 보완함으로써 교리가 서로 다른 교파들이 협력하여 복음 전파는 물론, 인류평화와 복지증진에 기여하는 선교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19세기 서양 근대사상의 일원주의에 기초한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 선교는 결국 제국주의, 신민주의 이데올로기 선교의 틀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증거에서의 대화’로의 선교방향 전환은 역사적이며, 필연적이다. ‘대화를 통한 증거’는 오늘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이다. 이것은 한국에 세워진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길이며, 한국교회가 자기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시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에서 찾기보다는, 교파적 정체성을 찾는데 집중해 왔고, 지금도 이 틀에 갇혀 있다.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정체성과 기독교정체성(교파적 정체성)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한국인이 된 것이 아니다. 또한 교파적 정체성의 구현은 한국선교초기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초기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정책을 일본식민지세력보다도 먼저 주창해, 국적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민족의 문제,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도피적인 태도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피압박민족에게 ‘개인구원’, ‘천당’, ‘복음전도’, ‘영혼구원’을 외치면서, 피압박민족의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그리고 민족의식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민족적 운명에 책임적으로 동참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교회와 역사가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한 몫을 했다. 한마디로 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을 신학적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영미선교사들은 선교 목표를 ‘조선인의 영혼구원’에서 찾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역사와 삶의 터전인 국가와 영토가 일본 제국주의의 신민지가 되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적 운명이 달린 투쟁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야심차게 벌인 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본식민지화에 직면해서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정치화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정치운동으로부터 정화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이 부흥운동은 선교사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교회 내 교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한국개신교의 신학적, 신앙적 방향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이는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에 의한 반기독교운동과 일본 신사가 남산에 세워지는데 빌미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민족의 역사와 유리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당시 항일민족운동가들은 개신교회가 침략자들의 앞잡이며,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의 장애물로 생각했다. 그렇다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 하지 않는 종교는 이미 가치를 상실하고,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한국기독교는 스스로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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