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목사

‘출애굽’은 <출애굽기>의 저자가 왜 당시 이집트 최고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관직, ‘바로’(Pharahoh)라고 표기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레빈슨(Jon D. Levenson)의 지적은 새겨들을만하다.

성서 저자들은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요 방편으로 언제나 역사를 사용했다.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가 필수로 여기는 역사적 정확성이나 세부사항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사를 기술하면서 어떤 역사가가 전쟁을 시작한 독일의 지도자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Levenson, Sinai & Zion: An Entry into the Jewish Bible; 홍국평 역. 『시내산과 시온: 성서신학의 두 기둥』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36.>

‘출애굽’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이집트와 관련된 구절에서 왕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예컨대 <창세기>에 아브람이 바로를 만나고(창 12:15), 요셉이 바로를 만난다(창 41:15). <출애굽기>에서 ‘요셉을 모르는 새 왕’도 바로이며(출 1:9,11), 역사서는 물론 심지어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비롯한 예언자들도 바로를 곳곳에서 언급한다(사 30:3, 36:6, 렘 25:19, 46:17, 겔 17:17, 31:2). 이렇듯 빈번하게 등장하는 바로를 동일 인물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애굽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에서 당시 이집트 ‘바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 서술의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 <출애굽기> 1-18장에는 바로가 최소한 110여 차례 집중적으로 나오지만 그의 공식적인 직함일 뿐 실제 이름은 단 한 차례도 거론되지 않는다. 알려진 대로 ‘바로’는 ‘큰 집,’ 또는 ‘궁전’에서 유래하여 이집트 19 왕조(1306-1200 B.C.E.)부터 오늘날의 ‘백악관’이나 ‘청와대’처럼 최고 통치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Sarna, Exodus, JPS Torah Commentary, 6.>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바로는 람세스 2세(Raamses: 1279–1213 B.C.E.)일 가능성이 많다. 그는 이집트의 행정 수도를 나일강 하류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라암셋’(출 1:11)이라고 명명했다.<Michael Rice, Who's Who in Ancient Egypt (New York: Routledge, 1999) 165.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6세기, 13세기, 또는 12세기로 상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람세스 2세 때로 추정한다. Gary A. Rendsburg, "The Date of the Exodus and the Conquest/ Settlement: The Case for the 1100s," VT 42/4 (1992) 510-27.> 람세스 2세는 민간인을 비롯한 외국 노예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인 것으로 <출애굽기> 내용과 어느 정도 부합한다. 그렇다고 탈출이 단 한 차례 있었던 사건으로 못 박을 수도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말라마트(Abraham Malalmat)는 그의 논문 제목이 암시하듯 히브리 또는 이집트 노예들의 탈출이 오랜 시간 여러 차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특정한 연대에 집중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한다.<Malamat, "Let My People Go and Go and Go and Go: Egyptian Records Support a Centuries-long Exodus." BAR 24/1 (1998) 62-66.> 이와 같이 여러 시기에 걸쳐 탈출이 있었을 뿐 아니라 압제자를 포괄하는 의미로 고유명사보다는 ‘바로’라는 관직을 활용한 것이다.

구약성서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의 구체적인 시기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성서 저자들의 독특한 역사관에서 기인한다. 구약성서의 역사 서술은 근대 이후 그것과 달라 세부 자료에 관한 객관적인 기록이나 역사적인 변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따라서 역사적 정확성이나 구체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물리적인 역사(Historie)로 간주하기 어렵다. 더구나 <출애굽기>를 기록할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라는 관점과 개념을 상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성서 기자들의 관심은 그들이 다루려는 역사의 기억을 선택한 후 신학적인 목적으로 재구성하여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록한 내용은 의미의 역사(Geschichte)라고 이해해야한다.

이와 같은 성서 저자들의 역사관은 탈출 경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경로와 거리 등을 제시하고 있으나(민 33:5-49, 출 12-15장), 그 중에서도 ‘얌-수프’를 비롯한 믹돌, 바알스본, 비하히롯(출 14:2) 등의 위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역사를 통하여 궁극적인 메시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신학적인 진리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적 역사관에 필수적이랄 수 있는 사실의 정확성이나 세부적인 묘사는 그들의 일차적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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