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하여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
문고리 고치다가
못 대신 손을 찍었는데

쇠 부품 하나 휜 것도
사람을 부르면, 새로 사 끼우면
나의 쓸모는 어디 있나

어제부터 아팠던 것처럼
새까맣게 오늘이 아프고
내일이 어떻게 아플지 보이는 건
고통이 고통보다 고통스런 이유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나는
먹을 수도 잘 수도
깰 수도 없이
총기난사, 대량살상 기사를 보다
지구 반대편을 닫다, 깜짝
놀란다 아 이거 진자 아파

전부 나 같은 것들 때문이야

라고 손끝으로 말한다

- 『모든시』 2018 가을호에서
*류성훈 :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 정 재 영 장로
시를 읽을 때 감동을 받는 작품은 쉽지만 언어 속에 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환상시라는 이름의 난해한 시를 많이 본다. 그런 경향의 작품들은 각자 편하게 해석하고 감각을 하게 하는 자유스러운 면에서는 고맙기도 하다. 그러나 소통이 단절된 언어의 사용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라 할지라도 난감할 때가 많다.

이 작품은 우선 그런 면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쉬운 언어의 사용이다. 모든 세대의 공감을 아우르는 가능성을 가진다. 어려운 전문용어도 아니어서 어떤 말도 사전이 필요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공간을 넓히는 역량도 대단하다.

첫 연의 문고리와 손이라는 작은 의미의 개인적인 관심을 보편적인 인류 관심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끌고 간다. 손이라는 몸의 작은 일부 고통을 총기난사, 대량살상 기사를 통한 인류의 전체 고통으로 확장시켜 연상하게 한다. 자기 고통과 남의 아픔을 동일화시킨다.

2연에서는 개인적인 소소함을 말한다. 설혹 고통을 감당하더라도 문고리라도 고쳐야 실존의식을 느끼는 마음이다. 그러나 다음 연에서 그런 개인적 담론이 거대 담론이 된다. 지구 반대편의 고통도 자기 손의 고통과 같이 실체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고통은 인간의 연약성이나 한계성으로 온다는 것을 6연에서 말하고 있다. 즉 지구 반대편 고통도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함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위현실의 모든 고통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곧 자책이다.

이런 이미지 양극화 작업은 소위 융합적 기교다. 모든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거대한 인식과 상상인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난해하지 않고서도, 상상을 확장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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