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주의와 승리주의에 도취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각 단체 및 교단에서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과 의미를 되새기며,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다짐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삶의 변화는 그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실컷 우려먹는 결과만 낳았다. 그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올해 1년 동안 한국개신교가 업적주의와 승리주의에 도취돼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부터 이탈했다는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기보다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께 돌려야 할 영광의 부와 찬양을 교회 자체, 아니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여전히 성직매매를 비롯한 담임목사직 세습, 성직자들의 윤리적 타락, 제왕적 담임목사, 로마평화(팍스), 가부장적인 위계질서, 성서의 경제관에서 이탈, 루터의 만인사제론 거부 등등 종교개혁정신으로부터 이탈해 하나님보다 맘몬을 숭상한다. 그렇다 보니 한국개신교는 세상적인 흐름에 따라 권력을 쫓고, 약함을 통해 강한 힘을 보여주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서 벗어나 사회로부터 차폐당한 자, 경멸당하는 자, 학대받는 자, 권력이 없는 자, 억압당하는 자들을 경멸하며, 경쟁적으로 호화로운 십자가탑 높이기에 급급했다.

오늘날 교회는 경쟁주의와 승리주의, 업적주의에 매몰돼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줄기차게 외쳐대는 부흥운동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경쟁논리와 군사문화적 승리주의가 결합된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는 결국 사회로부터 차폐당한 자, 경멸당하는 자, 학대받는 자, 권력이 없는 자, 억압당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줄기찬 부흥운동에도 불구하고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선교의 자원을 스스로 교회에서 몰아낸 결과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교회성장론은 개신교 신학의 변질과 교회의 변용으로 나타났다. 한국개신교는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면서, 종교개혁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공동체성, 사회적 연대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락한 중세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믿음에 의한 의인, 만인사제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로마 가톨릭 신학의 근간인 공로의인, 정직자 독점주의, 거기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의 부자유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목표였다.

 
개교회주의, 공교회성•세계선교의 개방성 상실
교회의 신뢰성 저하, 교회 연합과 일치운동 비상

개별교회주의 공교회성 상실

개신교적 전통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성숙성과 거기에 기초한 책임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개신교는 개인주의적 기복신앙, 교인들의 공동체성 부정,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과 연대성을 거부하는 바람에 교회의 공공성과 세계성을 스스로 버렸다. 그렇다보니 개신교회에는 가부장적인 이기심에만 기초한 기복신앙만이 존재한다. 이 기복신앙은 한국의 전통적 종교인 샤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양적성장만을 추구하는 개신교회들이 교인들의 심성을 오염시키고 있다.

샤머니즘과 유착 혹은 타협 현상은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 사찰 안에 삼신각, 칠성각 등을 세움으로서 샤머니즘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기복신앙을 기초한 샤머니즘과 기독교 간의 유착 관계는 처음으로 오순절계통의 교회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들 교회는 요한복음 3장 2절 말씀인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로라” 등의 특정 성경구절을 마치 기독교 전체의 진리를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 기독교의 신앙을 기복신앙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목사들이 설교 중 연발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는 도식에서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적 축복중심의 신학과 설교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성서해석 근간인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라는 해석학적 도식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율법 없는 복음’, ‘복음 없는 율법’의 선포는 기독교 전체 진리를 왜곡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의 설교와 같아서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 즉 율법을 배제한 ‘꿀맛 같은 복음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시대의 반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교회 중심의 집단주의 만연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개별교회주의, 개인주의, 집단주의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교회는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특수집단으로 게토화 되고 있다. 또한 교회는 정직자나, 특정인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 담임목사 세습을 강행하는 교회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담임목사와 교인 간에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명성교회, 서울교회, 두레교회, 효성교회, 북성교회, 사랑의 교회, 시온성교회 등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교회법과 제왕적 목사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분명 교회는 특정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이다.

한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 계통의 교회는 가톨릭과 성공회와 같은 감독제 교회가 아니다. 회중중심의 교회이다.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개별교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장로교 계통의 개별 교회주의가 오늘 한국개신교의 역사 발전과정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자 전통적 주교제 교회인 감리교를 비롯한 나사렛교회, 루터교회 등의 주교제 교회까지도 이제 목회자의 청빙 등이 개별교회로 넘어간 지 오래다. 회중교회인 장로교계통의 교회 안에서 목회자 세습을 둘러싸고, 원로목사와 교인간의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회중교회의 원칙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독일의 경우, 1918년 민주혁명을 통해서 ‘헌법적 교회’가 실현되었다. 여기에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이 요구했던 12개 논제가 큰 영향을 주었다. 혁명 전까지 주교들이나, 영주들은 성직자의 임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400년이 지나서야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명제 하나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1918년 이전의 독일교회로 회귀하고 있다. 개별교회의 권리신장을 배경으로 발전한 개신교는 오늘날 개별교회주의가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원인은 교회가 개별교회주의, 담임목사의 제왕적 교회로 변질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 각국에 전파된 개신교들은 각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의 배경을 바탕에 두고 여러 모양으로 발전했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공교회성과 세계선교의 개방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19세기 세계선교 이전에 유럽과 북미 개신교에서 경험한 것이다. 개신교가 공교회성을 상실하면서, 선교자원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 전철을 한국개신교가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개별교회주의는 신학적,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신학적으로는 종교개혁정신에서 이탈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공교회성을 상실했다. 그렇다보니 이웃교단, 이웃교회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당 안에 가두는 우를 범했다. 성전 하나님, 성전 예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교회는 기도나 드리고, 자신을 수양하는 폐쇄적이며, 은둔자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오늘 한국개신교인들은 혼자만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된다. 너와 내가 없다. 이웃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남한민족만 가는 곳도 아니다. 남북한민족, 아니 23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세계민족 모두가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공교회성은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교회당을 개방하고, 공적 집단으로 지역주민의 삶에 참여,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잃어버린 선교의 자원을 회복하는 것이다.

배타적인 교파주의에서 벗어나라

일본 제국주의 당시만 해도 교회는 내 교회, 네 교회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한 형제이며, 자매였다. 이웃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리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참석해 은혜를 받았다. 일제 말 한국개신교는 조선기독연합회라는 이름아래 하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영미의 선교사들은 영미교회의 교파주의를 재건하는데 경쟁을 벌였다. 장로교단은 200여개로 갈라져 이제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나사렛교회 등 300여개의 교단이 공존한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교파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배타적 교파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개신교 배타주의는 개별교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배타적, 집단주의의 성격을 그대로 띠고 있다. 교파주의는 세계 개방성과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을 해결하자는 의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 한국교회총연합 등의 연합단체가 탄생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연합단체들은 교단의 배타성과 우월성을 내세워 연합단체를 파행으로 이끌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 보수교단의 연합단체인 한교총을 비롯한 한기연, 한기총의 통합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그것은 공동으로 하나님나라선교를 감당하겠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존재하며, 이웃교단과 이웃교회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다.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영광과 부, 찬양을 교회 자체, 아니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지는 왜곡되고, 교회를 역사적 완결된 실체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한국개신교회는 교회주의와 교파주의, 교권주의가 판을 치며, 교인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피안적이며, 종말적인 것도 아니다. 주기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에서 일 할 실체이며, 역사적 하나님나라운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잃어버린 신뢰성을 회복하고, 교회성장의 원동력인 선교의 자원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기쁜소식)의 정신이며, 종교개혁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직자들의 무질서로 인해 혼돈을 겪고 있는 교인들을,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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