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전쟁의 개시를 하나님의 통치행위로 받아들이던 시대. 전쟁에 임하는 왕은 반듯이 하나님의 응답(신탁)을 받아야 했다. 마침 블레셋이 전차 3만에 기마병 6,000이나 되는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이다.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사울왕은 초조한 마음으로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 다급해진 사울은 자신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됐는데, 7일이나 늦게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며 노발대발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울의 자식들은 앞으로 왕으로 세우지 못한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삼상 13:5-14).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사울이 전쟁 개시의 제사를 드린 행위를 신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일 같아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 그만큼 무거운 죄였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은 앞의 사울과는 달리 신성한 책임의 방기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증언한다. 빌라도는 재판과정에서 예수를 죽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눅 23:23). 바로 이 장면이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서 최고 재판관이기도 하다. 그런 재판관에게 신율이 있다면 법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백성들의 고함소리에 죄 없는 예수는 죽이게 내주고,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한 자는 살려주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고서도 자기는 예수를 죽인 책임이 없다며 물로 손을 씻기까지 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간교한 자이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 권력의 어리석음, 난폭함, 무지함, 간교함을 폭로한다.

요즘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권력의 하수인 노릇한 것이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재판을 거래를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어서이다. 죄질로 치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고약하다. 그런데도 도무지 염치가 없다. 여전히 자기반성은 없고 ‘사법부 독립성’ 운운하며 법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빌라도가 따로 없어 보인다. 사법부가 그러면 그럴수록-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법 위에 군림한다는 더 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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