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선교사 영혼구원 매몰

미국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한국에서 실천하고 있는 신앙 형태는 1세기 전 (1700년대 말) 미국에서 극복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앙형태는 100년 전에 미국교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매우 보수적인 신앙 형태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선교초기의 영미선교사들은 신학에 있어서 질적으로 뒤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선교정책을 새롭게 마련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의 선교는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신앙을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전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엄격성과 보수주의 정통성을 고수했다. 오늘 한국개신교의 선교사들이 해외 선교에 있어서 이를 견지하며,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 사회와 정치를 몰각하고, 개인구원에 중점을 둔 영혼구원을 외치는 것도 이들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이다.

한국개신교 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은 변질돼서 안된다”며, 그들이 가져다가 준 복음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이들로부터 전해진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가 됐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이단이며 사이비이다. 이들의 영향아래 있는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영혼구원, 축복, 천당 등을 외치며, 우리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아서 브라운 박사는 한국에 온 영미선교사들의 자질을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앞서 있지만 균형, 통찰력, 그리고 자기 통제를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에 파견된 대부분의 선교사가 정규신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부는 성경학교 수준의 교육만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어서, 안타깝다. 교육수준이 신앙의 척도, 신학의 수준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한국의 유서 깊은 문화와 역사, 정치, 사회적 상황을 소화하고, 거기에 따른 선교정책을 수립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를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선교라는 열정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지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방법, 100년전, 1700년대 초 낡은 방법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학이고, 신앙이 되었다. 이들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근본주의 신학을 한국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그리고 사경회를 통한 복음전도를 강조했다.

오늘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이 부흥회에 열심을 내며, 성장주의와 업적주의, 승리주의에 매몰돼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보수적인 한국개신교는 ‘영혼구원’을 외친 결과 교회를 완결적인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마디로 교회를 신과 일치시켜버린 것이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목회자는 하나님보다 맘몬을 숭상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설자리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교회는 완결적인 집단이 될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민경배 교수는 “미국의 교파, 교회적 탈사회성과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함께 적용하여 소박한 복음 전파 이외의 범위 한정이 처음부터의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민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에 온 영미선교사들은 고난당하는 피압박민족의 아픔은 외면하고 ‘정교분리’를 주창,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식민지 세력과 결합돼 한민족의 아픔을 몰각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수긍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의 ‘정교분리’ 선교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철저하게 악용되어 왔다”
‘정교분리’의 목적, 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정치적 관용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개신교의 주류는 보수주의자

그것은 일본의 방해로 자신들의 선교활동이 위축될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 이들이 주창한 ‘정교분리’는 미국의 정교분리에 영향을 준 로크의 ‘정교분리’와는 크게 다르다. 로크는 “국가가 종교적 활동에 대해서 관용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와 교회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로크의 캐롤라이나 주의 헌법 제정을 위탁받았고, 1669년 그가 만든 헌법의 주요골자는 이렇다.

“모든 주민은 교파들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또한 7-8명 이상 구성원을 가지고 있을 때 종교단체는 교회로서 인정된다. 그 교회의 구성요건은 △한 분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공적으로 예배되며 △정부가 요구할 때 주민들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종교적 집회를 방해받거나 종교적 견해나 예배방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즉 국가는 종교활동에 일체 개입해서는 안 된다”

로크의 이 헌법은 국가 또는 교파 간에 관용의 자세를 게을리 하면, 사회적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신학적으로 교리가 사회에서 갈등을 초래할 경우, 전통적 교리를 피해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정교분리’를 철저하게 악용하며, 권력의 주변에서 힘을 키워 왔다. 그 결과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은혜를 일부 목회자들이 받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제왕적인 목회자들을 보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주류가 되었으며, 교회와 연합단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세습문제, 윤리문제, 정치적인 갈등, 목회자와 교인 간의 갈등, 교인과 교인 간의 갈등 등으로 말이다.

오히려 정교분리를 주창했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더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진보적인 목회자들을 향해 ‘정치목사’, ‘좌경’, ‘용공’으로 몰아 붙였다. 하지만 이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권력의 주변에서 피 묻은 손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주도했고, 일제하에서 국가의 미래를 염려했던 그리스도인 애국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잘못을 범했다. 요즘은 거리로 나와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부정하며, 우익단체들과 손을 잡고 시위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최대 협력자였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최대한 협력을 하면서도, 그가 기독교인 아닌 것을 서운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영혼구원’을 외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에서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위급한 정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선교 및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그들은 근대 한국에 처한 역사적 상황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애국자들을 정치적으로 매도해 교회에서 추방했다.

당시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를 위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1910년 한국은 일본에 합방되었다(한일합방).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에 처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장으로서 교회의 정치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깨어난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교회의 조직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것은 3.1만세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선교 불안 느껴 ‘정교분리’ 주창

교회의 정치화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와 정면충돌 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화가 교리적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고 선교사업에 있어서도 일본식민지세력의 탄압으로 지장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복음증거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 드려 시작한 한국선교가 한국그리스도인들의 정치화로 인해서 일본인들의 간섭을 받거나, 방해를 받으면 허사로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당시 선교사들에게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회안의 애국지사들을 추방했다.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인 시간과 장소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에서 이탈했고, 지금도 이탈해 있다.

이를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영미의 상황에 맞게 전개된 복음선교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라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장로교는 일본식민지세력을 등에 업고, 6개의 재단법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1901년도에 있었던 ‘장로교 공의회(선교사들의 모임)에서 “교회는 국가의 사안들과 무관하고 따라서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관여해서는 안된다(<기독신보> 1901년 10월 3일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5개항의 ‘교회와 정치’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밖에도 이 결의문은 △교회의 건물이나 목사관은 정치적 토론의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오직 그리스도인 개인의 사적문제이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교회의 정치화를 처음부터 방해했다. 분명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교회는 권력을 등에 업고 출발했다. 이런 보수적인 교회와 목회자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축적한 힘을 그냥 빼앗길 리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교회 신사참배 80년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일천만기도대성회’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이 기도회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으로 일반 언론의 광고란에 게제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수치이며, 분열된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데 비난을 면키 어렵다. 분명한 것은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보주주의자’라고 칭하며, 그것이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맘몬을 노래하며, 바벨탑을 쌓는데 경쟁을 벌인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무너질 것은 뻔하다. 특히 교회를 완결집단으로 만들어 교회가 하나님과 동격으로 만들어 버린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신학자들은 “초월적인 계시종교도 시간이 지나면 제도화되고, 성직자에 의해서 타락하며, 이로 인해 교인들은 혼란과 혼동을 겪게 되어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제도화시켜 교인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생각 없는 관념으로 인해 예수님의 ‘샬롬’과 ‘로마평화’를 분간하지를 못하고 있다. 교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평화는 예수님의 샬롬이 아니다. “힘이 있어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며, 로마평화(팍스)를 부르짖는다.

이것은 분명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승리주의의 산물이다. 콜럼버스에 의해서 시작된 세계화는 한마디로 원주민들을 침략하면서 시작됐다. 남미로 간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살육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로 떠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세계 백성들이 섬기는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할 것이다”는 것을 굳게 믿고, 항해의 길에 올랐다. 그 복음이 한국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복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을 비롯해 양대전쟁,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전쟁은 기독교국가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아이러니 한 것은 전쟁무기를 팔아서 드린 선교헌금을 가지고, 제3세계 국가의 선교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지도자 가운데서도 일제 36년, 6.25 한국전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한마디로 참담하고, 안타깝다.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 아니다. 평화와 화해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향해 화해자, 중재자라고 말한다. 만약 국민들이 전쟁의 하나님이라고 인식한다면, 누가 교회에 다니겠는가.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

초기 선교사들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한 불간섭적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중립정책은 어떤 변경도 없었다. 그것은 서구문화가 기독교문화로 착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정치적 억압을 몰각한 가운데 1907년 대부흥운동을 벌였다. 이와 함께 선교사들은 나라의 위기에 처해 전개되고 있던 독립운동 혹은 정치화로부터 교회를 정화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목표가 부흥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정치화로부터 정화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고 손규태 박사는 이를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는 보수적 교회로서 확고한 신학적, 실천적 기초를 확보했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의적 교회들은 민족해방운동,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것들을 정죄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보수주의 조류는 다양한 모습을 취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관통해서 흐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충실한 동맹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손 교수의 지적대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자들의 동맹자이며, 오늘도 이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이들은 해방이후 오늘까지 정치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들을 외면하며, 교회성장과 승리주의, 업적주의에 매몰돼 있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선교의 자원이었던 농민, 노동자,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보수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한 목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잘못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보수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목회자가 지적할 정도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보수라는 이름 아래 업적주의, 승리주의, 성장주의에 도취돼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보지 못했다. 반대로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교회는 철저한 과거 청산과 함께 획기적인 자기혁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 길은 교회가 가야할 길이며, 오늘 한국교회에 주어진 선교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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