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출애굽 경로를 따라가려면 민수기 33장을 참고하는 편이 좋다. 출애굽기 12-19장에도 여러 지명들이 소개되지만 이스라엘이 겪은 일화들과 함께 경로가 이따금 나오기 때문이다. 민수기에 의하면 바알스본은 이집트 라암셋을 떠난 뒤 숙곳, 에담을 지나 셋째 날 머물던 장소를 소개하는 장소 중의 하나로 언급된다(민 33:7). 두 책 모두 바알스본과 관련된 몇몇 공간을 동시에 소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바알스본에 관한 일차적 관심은 그곳의 대략적 위치다. 올브라이트(W. F. Albright)는 기원전 6세기경 페니키아의 문헌을 제시하며 바알스본이 나일강 하류의 다바네스(Tahpanhes), 현재 지명 사이드(Said) 항구 인근을 주장한 바 있다(렘 44:1). 호프마이어는 바알스본을 나일강 하류의 발라 호수 부근의 ‘바알의 바다’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게 되면 바알스본은 나일강 하류 고센 지역에서 수르 광야 쪽 지중해 연안의 어느 지점으로 압축된다. 곧 현재의 사이드와 신 또는 펠루시움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추적한 바알스본의 공간적 위치는 예상되는 장소를 추정할 뿐 특정한 좌표를 제시할 수 없다.

출애굽 초기 경로에 바알스본이 언급된 것은 바알 신앙이 나일강 하류 또는 이집트의 접경지역에서도 낯설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앞에 소개한 두 학자에 따르면 가나안 바알 신앙이 이미 이집트 고센지역까지 전파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나일강 하류의 풍부한 농산물로 인한 활발한 무역과 교류 덕택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테고 가나안의 바알 신앙도 자연히 오갔을 것이다. 이집트와 가나안의 이질적 신앙은 적대적 조율 관계를 통해서 공존할 수 있었다. 훨씬 후대의 기록이지만 기원전 6세기로 추정되는 한 편지에는 “바알스본과 다바네스의 모든 신들의 축복을 빈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알 신앙과 이집트 신앙의 공존을 반영한 기록이다. 이로써 바알스본과 다바네스의 경제 및 문화적 교류는 확인됨 셈이다. 다만 출애굽 경로의 바알스본을 통하여 이집트를 떠나자마자 곧 대면하게 될 또 다른 문명 가나안의 신앙과 현실이라는 예표가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따라서 바알스본이 출애굽의 초기 경로, 즉 바다를 통과하기 직전에 언급된 것은 다분히 계획된 경로라고 본다. 왜냐하면 바알스본의 지명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로에서 단순히 지나가는 거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풍의 신 ‘바알’이 자연재해를 몰고 오듯 이스라엘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예고한다. 더구나 ‘바다’와 함께 바알스본이 언급됨으로써(출 14:2) 바다의 공포와 혼돈을 증폭시키면서 바알 신앙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출애굽 저자의 담대한 신학적 의도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야웨가 이스라엘을 바다에서 구원하고 바알스본을 대면하게 함으로써 거대한 혼돈의 세력을 제압한 신임을 입증하고 야웨 하나님 스스로 경배의 대상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바알을 비롯한 가나안 우상들(gods)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하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편 시인은 ‘스본’과 시온을 연결하여 시온산이 야웨의 성소라고 노래한다. ‘자폰 산의 봉우리 같은 시온 산은, 위대한 왕의 도성’(새번역. 시 48:2b). 연구자들은 바알의 본거지는 우가릿 북쪽의 ‘스본’ 산이고 그곳에 바알 신전이 있었다고 본다. 시내산이 야웨 하나님의 산이라면 바알스본은 가나안 최고의 신 바알의 산을 가리킨다.

출애굽 저자는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과 가나안의 바알 신앙의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을 잘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바알스본의 지리적 위치는 일차적인 검토 대상일뿐 여기에 더는 메일 필요가 없다. 출애굽 경로에서 바알스본의 지점을 확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따로 있다. 그것은 곧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거듭난 이스라엘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속시키려는 우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신학적 의도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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