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재 형 목사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라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2)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표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구약의 성도들을 향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7). 주님의 증인 중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4)”고 했고,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눅 1:1-4)”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18)”고 증거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는데 주님이 3년 반 동안 유대에서 사신 삶 자체가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등 표적의 역사가 매일매일 일어나는데도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은 그 표적의 홍수 속에서 표적을 볼 수가 없었을까요. 표적에 의지하는 사람은 엄청난 표적이 그의 삶에 나타나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이 진리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본 사람은 이전에 이와 같이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식의 본질이 되시는 분이 매일매일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거기서 진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로만 보았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지혜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의지했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해서 주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지한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편 42:6)”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낙망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표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 만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눈물로 감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사와 만족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그대로 평생을 믿음을 잃지 않고 만족하며 살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 살아있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의지하며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생명나무숲전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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