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언급될 정도로 파급력 있고 뜻 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3.1절이란 그저 휴일 중 하나라고 인식될 정도로 그간 일반 대중에게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사실.

이를 3.1운동을 기억하고자 월간 <기독교사상 2월호>는 ‘특집 3.1운동 100주년’을 마련해 다양한 각도에서 3.1운동을 바라봤다.

<기독교사상>은 지난해부터 별도의 코너를 마련. 역사의 주요 분기점이 되었던 3.1운동을 잘 다루어지지 않는 몇몇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 2월호에는 남한이 아닌 북한 지역에서 선구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대해 다루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김승태 박사의 글과 민족대표 33인의 변절 문제를 기독교와 관련지어 논술한 광주대 한규무 교수의 글, 중국 잡지 속에서 3.1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도했는지를 다룬 미도중국선교연구소 소장 문영걸 박사의 글을 실었다.

먼저 김승태 박사는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선구적 3.1운동’이란 제목의 글을 북한 지역에서 선구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대하여 논의했다.

김 박사는 3월 1일에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발발한 지역은 전국적으로 9곳인데, 그중 서울과 고양을 제외한 7곳(의주, 선천, 평양, 진남포, 안주, 원산, 해주)이 현재의 북한 지역이라고 밝히며 논의를 시작했다.

김 박사는 그 일곱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주도자들과 그들의 준비 과정, 당일의 진행 상황, 그로 인한 결과 등을 차례로 다루면서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김 박사는 “의주의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족대표가 직접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고, 의주·선천·평양·원산·해주는 민족대표를 배출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으며, 교회 전체가 이 운동에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며 “또 북한 지역의 선언과 만세시위에는 기독교계 인맥과 교회, 학교 조직 등이 동원되었으며 의주와 평양의 경우 독립선언식 또한 기독교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규무 교수는 ‘기독교계 민족대표 중 누가 변절했는가’란 제목의 글을 통해 “기독교계는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이 16인(장로교 7명, 감리교 9명)에 달할 정도로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며 “글의 제목처럼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알곡’과 ‘가라지’를 가릴 뿐만 아니라 기독교계가 더 차분하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먼저 한 교수는 민족대표 33인이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띠고 있는가의 문제와 민족대표 선정 과정을 간략하게 논의했다.

또한 한 교수는 본격적으로 기독교계 민족대표 16인의 성명, 생몰 연대, 본적과 주소, 형량, 독립유공자 서훈 등 각 사람의 면면을 정리하여 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 16인의 법정진술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내면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결론적으로 한 교수는 “16인 중 박희도와 정춘수의 변절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이갑성은 의심은 있으나 쉽게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끝으로 문영걸 소장은 ‘중국 잡지 속의 3.1운동’이란 제목으로 중국의 5.4운동이 우리나라 3.1운동의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중국 잡지 속에서 3·1운동을 어떻게 평가하였으며, 어떤 보도들이 이어졌는지를 연구해 정리했다.

먼저 한 교수는 먼저 대표적인 중국 잡지들이 보여주는 이 운동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을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폭정 때문 ∆이 운동은 평화시위의 모범 ∆이 운동의 주체는 학생들과 기독교인 등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책속의 한 교수는 그 잡지들이 언제 어떤 제목으로 3.1운동을 성원하는 기사를 발표했는지를 정리하고, 대표적인 기사들의 원문을 직접 번역해 소개함으로 3.1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입장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한 교수는 “중국 5.4운동의 지도자들은 3.1운동을 바라보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독립정신에 깊은 자극을 받아 5.4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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