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용 화 목사

3.1만세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평화운동이며,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3.1만세운동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하의다. 오늘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각 단체에서 준비한 3.1절 행사는 새로운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한민족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왜곡하고, 이벤트성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3.1만세운동 기념행사는 민족대표 33인, 아니 기독교 대표 16인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100주년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 내면을 깊게 들여다가 보면, 몇몇 인사들의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만세운동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분명 3.1만세운동은 민족사적, 기독교사적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모일간지는 2019년 연중기획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를 기획, 연재하고 있다. 첫 번째 기획기사로 ‘민족대표 기독인 변절논란’을 실었다. 이 기사에서 “민족대표 기독인 16인중 14명은 독립의지를 지켰다”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왜곡시켜 온 역사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안타깝다.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분명 없었다. 이들은 태화관에서 자수인지, 아니면 경찰에 의해 발각되었는지는 몰라도,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어떠한 저항도 없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당시 학생들은 33인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을 믿지를 않았다. 학생들은 33인의 만세운동과는 별도로 만세운동을 따로 준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1만세운동 한 달 뒤인 4월 1일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주체가 돼 일으킨 만세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날 만세운동에는 평양과 광주, 대구 등지의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상경해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의 만세운동은 조직적이면서, 매우 치밀했다. 이들은 4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문을 버선 등에 숨겨 귀향해 당시 최고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교인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서울로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3.1만세운동은 기독교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민족해방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 이들은 맨몸으로 일제의 총과 칼에 맞섰다.

만약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이 있었더라면, 3.1만세운동의 양상은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3.1만세운동의 주체는 33인이 아니다. 기독농민이며, 기독여성, 기독학생, 걸인, 창녀, 백정이다. 여기에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선교사들은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서, 맨손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을 “정부에 불만을 가진 ‘불순분자’의 반정부운동이다”고 매도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에 맡겨진 소임이다.

천안성문교회 담임•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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