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마가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장면을 보여준다(막 2:1-12).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으나 ‘무리’(오클로스)가 많아서 예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가난한 이들이 더 화급한 이를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의도된 것은 아닐지라도, 민중 역시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자기들보다 더 비참한 이들을 배척한다.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혹은 그보다 못한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가로막힌 길을 타개하기 위해 지붕을 걷어내고 환자를 달아 내린다. 땅의 길이 막히자 하늘 길을 연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향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자 그 곳에 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에 대해 속으로 힐난한다. 저들은 예수의 치병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죄 사함의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내막은 그게 아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무기로 백성을 억압하면서도, 죄 사함의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며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외면했다. 자기들이 죄인으로 묶어놓고, 푸는 일은 하나님께 미룬 것이다.

마가는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전한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를 영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죄 사함의 권세”는 불의의 희생자들에 대한 강력한 ‘복권선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는 땅에서 사람들이 묶어 놓은 것을 푸는 권세를 지니신 분, 땅에서 죄로 인해 억압당하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분,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해를 입음에도 개의치 않으신 분이 바로 예수이다. 이것이 마가가 바라본 예수이고, 마가가 말하는 복음이다. 오늘날도 병 고치는 은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선 행위도 칭찬할 일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죄 사함이다. 세상 권세와 충돌하는 행위라서 그런다. 마가는 이렇게 예수의 죽음이 죄 사함 때문이었음을 증언한다. 치병 행위는 다른 종교도 한다.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때로는 세상 권세와 대립해서 죄를 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는 일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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