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우리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독립운동가 김 마리아를 기억한다. 김 마리아는 895년 아버지를, 1904년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시키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 김규식, 유동열, 이동휘, 이갑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인 필순의 집에서 공부했다. 190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교파관계로 곧 연동여학교(현재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하여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히로시마의 긴조여학교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했다. 1918년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 등과 구국동지가 됐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2・8독립선언문 수십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1919년 3・1독립운동 준비에 참여, 황해도 지역에서 동지 규합을 담당했다.

그녀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정신여학교 기숙사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그러나 동년 8월에 면소 석방됐다. 출옥 후 정신여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의 출옥 환영연에서 그녀는 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이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를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로 보냈다. 독립선언문을 배부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됐다. 6개월여의 예심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에 걸려 대구병원에서 치료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니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에 회부됐다. 이때 병으로 해변에서 휴양하도록 승인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는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서 수개월의 치료 끝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했다. 1923년 6월에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했다. 1923년에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휴양하다가 미조리주의 팍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대학 도서실에 근무하기도 했다. 1935년에 귀국하여 원산의 신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되던해 1945년 고문의 여독으로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후 2004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생명의 담지자인 김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민족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들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라의 독립,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우리는 이들의 독립운동을 잊을 수 없다. 3.1만세운동을 100주년에 즈음해 이들의 나라사랑과 고난의 십자가를 기억한다.

햇빛중앙교회•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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