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삼일만세 운동 사건이 일어 난지 100년을 맞는 대한민국 온 국민들은 나라가 세계 속에 우뚝 서서 무역 십대 열강이 되었음을 자부와 긍지를 가진다. 나라의 밑바탕에는 100년 전 조상들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식민지배에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일어나 항거로 인해 일제의 총칼로 인한 만행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할 때에 흘린 피가 거름이 되었다. 순국선열들이 삼일만세 운동을 일으킬 때에 참여한 애국국민들의 유형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 유교 그리고 여러 종단의 신자들과 비록 종교는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대한민국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두 한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1919년 3,1만세 운동에 나선 국민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다, 사회민주주의다 공산주의, 보수와 진보라 하는 사상과 이념을 앞세워 나서지 않았다. 오로지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에 속한 것으로 하나가 되어 오직 일제의 만행에 대항 했다. 33인 가운데 기독교, 천도교, 불교, 기타 종교인들이 혼합되어 있었으나 자신들의 신앙과 종교를 주장 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독립에 온 힘을 모았다. 다른 종교의 사정은 뒤로하고 우선 기독교의 정황은 글로 표현하기 부족한 실정이지만, 삼일운동 거사 때에 국민들은 모두 손에 들고 일시에 만세 함성을 높일 때에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교회 지하실에서 숨죽이며 언제 어느 때에 발각 되면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태극기 제작에 목숨을 걸은 피맺힌 작품이다. 만세 사건은 민족의식 고취와 미래를 오직 독립과 해방을 위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민족 혼의 결집이었다.

세월이 흘러 민주주의 쟁취와 기존 정치세력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국민의 일부가 촛불을 들고 나섰다.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나 새로 부상한 정치 세력에게는 천우의 기회가 되어 국가 권력을 쟁취해 정치적인 소신을 펴는 기회를 촛불 세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성과다. 특히 젊은이들이 구태 한 정치를 부정하고 정치의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촛불을 들었으나 집권 세력들은 순수한 촛불의 의도를 정략적으로 정치 운영에 활용하는 누를 범 하는 것 같은 모습이 좀 안타깝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역시 정치권력의 맛을 본 신진 정치세력들도 집권을 경험하지 못한 어색함이나 서툰 정치력으로 인해 국민들을 촛불 세력과 태극기세력으로 갈라놓는 어처구니없는 국론 분열을 낳았다. 집권 세력들은 촛불 세력이나 태극기 세력 모두 대한민국을 이룬 주권자들이자 부모와 자식의 세대인데 분열 보다는 하나로 화합하도록 포용정치를 했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북한과 남한의 이질적인 모습보다 더하게 보이게 하니 안타까운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가 부끄럽다.

현 정치세력 가운데 지성인을 자처하는 집권당 실세 가운데 한분은 100주년을 맞은 삼일만세운동에 대해 촛불혁명의 근원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무리 식자층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엇인가 잘못된 표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삼일 독립운동은 일제식민세력인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지배 받는 나라 백성들의 절규요 피맺힌 한을 참지 못해 목숨 걸고 항거한 애국애족의 발현이다. 그런데 아무리 촛불 혁명이 현 정권의 든든한 우호세력이 벌린 기적 같은 혁명이라도 국가와 국가 간의 지배와 피지배에 항거한 독립을 위한 몸부림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아무리 정치권력의 실세라고 해도 본인도 다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아무 역사적인 평가도 없이 촛불혁명의 뿌리를 삼일만세 운동에 두는 자의적 해석은 식자층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논리다. 역사는 정치권력 실세라도 사실을 오도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 눈으로 본 삼일운동은 정치적 또는 사상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회조직을 활용한 모습이다. 만세운동에 동참한 신자들은 나라가 있어야 자유도 언어도 삶도 있음을 깨우쳤다.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 나선 국민 모두의 희생이 뒤 따랐기에 삼일운동은 가능했다고 기독교 사가들은 부정치 않고 역사의 기록으로 정의하고 있다. 결국 삼일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국민들의 피맺힌 한의 절규다. 기독교의 신앙을 신봉한 신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 같은 시대에 국가를 위해 교회의 재정과 인력 그리고 교회조직을 다 헌납했다. 대한민국의 오늘의 눈부신 성장은 바로 100년 전 믿음의 조상들의 희생으로 이룬 찬란한 금자탑이다. 나라 없는 설음과 정치권력의 소외와는 그 근본이 다르다. 삼일만세 사건을 폄훼나 오용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