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와 교회의 양극화 현상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자본과 이념을 내세운 첨예한 사회적 불평등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뚜렷한 해결책도 없다. 대책이라고 해봐야 고작 일자리 창출, 국가의 지원을 통해 빈곤층을 최소화, 서로간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 대립적인 이념 극복 등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구호에 끝나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문제의 해결점이나, 적절한 대안보다는 그 양극화가 모든 분야에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큰 문제는 양극화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사회 전반에 거쳐서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의 문제를, 한국교회가 먼발치에서 정부가 해결해야 할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즉 양극화를 부추긴 한국교회가,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문제이다.

한국교회가 양극화의 중심

다양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내부조차도 양극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교회끼리의 양극화는 물론, 부자교인과 가난한교인들 사이의 분리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여전히 값싼 축복은 강조하고 있다. ‘진리’, ‘반공’, ‘보수’ 등을 앞세워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과 정치적 이념 대결, 지역 간의 대결, 남북한 간의 긴장을 고조 등 양극화를 부추기는데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는 등 반통일적인 모습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 교회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세태가 잘 말해 주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90% 이상이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 또는 미자립교회이다. 소위 대형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목회자가 생활할 수 있는 가난한 교회이다. 이것은 바로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작은 교회의 목회자를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골교회가 갈수록 비어가고, 도시에 교회가 개척되지 않고, 세워진 작은 교회를, 맘몬교회가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은 교회 목회자의 모습은 갈수록 왜소해 보이고 있다.

맘몬교회의 목회자들이 초청을 받아 한번 순서를 맡고. 자신을 알리는 홍보비로 교인들이 낸 하나님의 헌금, 수천만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맘몬주의가 깊이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이 작은 교회 목회자의 모습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으며, 대형교회와 작은교회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돈 많은 부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이권에 따라 큰 교회로 몰려가고, 가난한 교인들은 빈자리를 채워주어서 감사히 여기는 작은 교회를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축복의 척도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헌금의 액수로 평가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와 교인들을 평가하고, 부가 바로 축복이라는 그릇된 신앙이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목회자 중 신비주의자는 가난도 죄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도 있다. 과거 간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교회는, 이제 부자들의 교회로 변질되었다. 한국교회가 변화와 개혁보다도, 안정을 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 내의 가진자와 덜 가진자의 그룹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이것은 끝내 갈등으로 이어져 교인간의 다툼으로 분출되고, 양극화의 단초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된 한국교회는, 가난한 교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현재에 안주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표류하다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들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새로운 세력이 되고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말하는 ‘진리’이며, ‘바른 신앙’이고, ‘보수신앙’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내 양극화는 결국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결과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선교 초기 한국교회가 나눔과 섬김을 바탕으로 사랑의 선교를 실천, 전도의 경쟁력을 높였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선교 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병든자들을 고쳐주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 피압박 민족에게 나라의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워주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선교의 자원을 만들어 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교회가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 생명의 종교, 사랑의 종교로서,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

물질문명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는 결국 교회를 맘몬주의 사상에 길들여지게 했다. 그리고 서양교회와 마찬가지로 쇄락의 길을 걷게 했다. 이로 인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던 높이 치솟은 교회의 십자가탑은 빛을 잃어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 간에 편을 가르고, 생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업주의 편에 서서 노동자들을 ‘빨갱이’, ‘좌파’, ‘용공’ 등으로 매도하며, 양극화를 부추기는데 중심에 서 있다. 또한 사회적인 갈등, 계층간의 갈등, 이념적인 갈등, 지역 간의 갈등, 정치적 갈등, 종교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남녀 성대결 등 양극화를 부추기는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종북세력’, ‘친북세력’, ‘좌파’, ‘용공’ 등의 용어는 처음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이런 용어를 이용해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세력들을 ‘친북’, ‘종북’, ‘간첩’ 등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또 국민들 간의 갈등과 지역 간의 갈등, 이념적 갈등의 중심에는 늘 교회의 목회자들이 있다. 때문에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한국교회가 중간자의 입장에서 화해의 중재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종교집단으로 지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양극화는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망국병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는 한국교회가 문제의 단체로 지목한 교회와 교단, 단체가 가세,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양극화의 중심에 교회가

양극화의 문제는 인류의 출연과 함께 생겨난 사회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양극화 시위는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 등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다. 한국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본주의가 축적되면서 양극화의 폐해가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의 문제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문화/교육/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양극화 현상이 사회 전반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고 있다. 우리사회는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맞고, 국민간의 감정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양극화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치지도자 등 지도층 인사들은 일제히 사회통합을 이슈로 들고 나섰다. 대통령도 행복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소통, 양극화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국민대통합의 처방전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국민 양극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노사간의 갈등, 남북간 이념적 갈등, 세대간 갈등, 정치적 갈등, 영호남의 갈등 등 양극화를 부추기는데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한국교회 내부에서도 또 다른 양극화를 야기시켰다. 진보와 보수 간의에 일고 있는 전투는 총만 안들었지,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갈수록 파행으로 가는 한국교회연합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간의 끝없는 전쟁, 교회내 수구세력과 신진세력간의 다툼 등은 오늘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 양극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5%도 안 되는 중대형교회와 90% 이상을 차지하는 개척교회 및 미자립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사회 문제 못지않게 심각하다. 이와 더불어 목회자 세습 문제를 비롯한 목회자 사택비용과 거액의 은퇴금 논란, 수십억원의 교회재산 황령,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생색내기 행사 등은 작은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것은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성도간의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 같은 교회 성도간의 불신풍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서울시내 몇몇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담임목사를 둘러싼 교인들 간의 다툼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말하는 사랑이며, 진리이다.

맘몬주의가 양극화 가장 큰 원인

한국교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극화된 모습은, 맘몬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대표적으로 대형교회당과 임대교회 간의 양극화, 사례비를 비롯한 목회비의 양극화, 겉으로 나타나는 사택을 비롯한 자동차에 대비되는 양극화, 교권매수, 교단장및 단체장 장기집권에서 비롯되는 양극화, 담임 목회자세습 및 거액의 은퇴금의 양극화, 믿음과 실천의 양극화, 사명과 영성의 양극화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맘몬주의가 바로 신앙의 척도이고, 세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한국교회 양극화의 원인을 맘몬주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치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물신주의가 한국교회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을 섬기는 탐욕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은, 담임목사 세습과 성직매매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보다 목회자를 내세우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들을 출현시키고 있다.

양극화문제에 대해 한국교회는 국민통합, 교인간의 화합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리사회에 뿌리깊이 내린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이렇다 할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양극화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지만, 앞에 나서서 십자가를 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교회는 국민통합을 위해서 기도회를 여는 등 요란을 피웠지만, 이를 실천하는 목회자와 교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매우 서글픈 일이다.

국민통합을 위한 양극화의 해결점은, 양극화를 부추기는데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와 교인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목회자의 ‘마음의 변화’와 성서의 중심사상인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우리사회와 교회가 이렇게 되지를 않았을 것이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같은 사실을 자각하고, 교회의 모든 것이 세상을 향해 있도록 목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부목회자들은 “목회자 자신이 가난한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A교단의 박모목사는 “교회의 귀족화와 성직자의 귀족화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이다. 목회자들은 겉으로 말만 앞세운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것은 결국 교인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면서, 교회 내부의 다툼으로 이어지고, 목회자측과 반대측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일으킨다”면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통합과 한국교회의 화합을 기대하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건강한 사회와 교회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며, 교인들에게 성서의 중심사상인 사랑의 선교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귀족화와 목회자의 귀족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변화와 개혁을 기대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 것이다”고 귀족화 되어가는 한국교회의 모순을 지적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인지, 아니면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나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양극화의 해결은 기독교인 모두가 성서로 돌아가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실천을 통해 곳곳에 막힌 담을 헐어내고, 화합과 소통, 그리고 통합과 함께사는 상생의 시대를 여는데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한 교회와 사회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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