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메튜헨리는 “가시에 사과가 꽂힐 수 있고, 포도송이를 엉겅퀴에 달아맬 수는 있으나 지속되지는 않는다”라고 했고, 칼빈은 “덕(德)을 위장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없으므로 결국에는 그들의 위선이 끝이 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 7:18에서도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긴장하는 동안은 자신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감출 수 있으나, 마음 놓는 순간 즉시 그 속에 든 것들이 나타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 위장 의지가 끝나는 날 일생 감추어 두었던 악한 본성이 쏟아져 나옴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고 만다. 모든 위장은 반드시 벗겨질 날이 있다. 이에 관하여 마 10:26에서는 감추인 것이 들어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종종 위선자들의 외모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마치 독버섯이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독사가 화려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의 말과 태도는 양털같이 부드럽지만(롬 16:10), 때가 되면 그들 본래의 일그러진 모습이 드러나고 그들의 위장은 걸레같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드러남을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위선과 가장, 그리고 속임으로 넘쳐나고 있다. 마치 이것이 사회적 능력인 것처럼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어제 나경원 의원의 국회 연설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위장을 보았지만,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여당 의원들의 모습 역시 청치인의 역겨운 가장과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도 국민이 무섭지 않고, 그렇게도 민주주의가 우습게 보였다는 말인가?

지극히 양비론을 싫어하는 필자가 언제부터인가 양비론적인 글을 쓰고, 매사에 이어령비어령하는 버릇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를 편들고 누구를 믿고 누구와 함께 해야하는 지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몽땅 상대방 책임이란다. 정부 여당과 야당에서 나오는 문건 중에 단 한 줄도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이 없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여야 각 당과 정부에서 나오는 문건의 주어를 서로 상대방으로 바꾸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계도 다를 바 없다. 고래로부터 교회의 논쟁은 이단정죄로 귀결하기 때문에 죽어도 져서는 안되는 것이 교회 논쟁이다. 그 역사적 뿌리에 의해 교회에서 발생하는 분규는 모두가 죽을 때에야 끝나는 선악 논쟁이 되고 말았다. 패자가 없다. 아니 패자가 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말 세상보다 더 추악한 방법으로 이기려고 기를 쓴다. 결국은 교회는 망가지고 성도들을 상처받으며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주의 홀은 공평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날 위선과 위장을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저렇게 위장과 위선으로 가득한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교회만이라도 분열과 다툼을 멈추어야 한다. 복음에서 일치하고, 방법과 제도에서 자유롭게 하자. 갈라지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자. 이렇게 가면 교회도 세상도 같아지는 지점을 곧 만날 것 같은 두려움을 벗겨 낼 수가 없다. 어쩌려고 이러는가? 교회에 관하여 들리는 소리 모두 절망적이고 안타까운 이전투구의 이야기들 뿐이다. 청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주일 설교가 되는가?

정치인들은 거짓과 위선을 부려도 그것이 재주라고 말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그 자체가 허물이요 짐이요 회개해야 할 죄이니, 지금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열고 진솔하고 다정하게 순전한 마음으로 형제에게 다가가 더불어 화평하자.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향하여 숨김없는 마음을 열고 계신다. 그 분의 말과 행동에는 거짓이 없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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