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자기 분수를 알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몽유병자처럼 이룰 수 없는 상상의 괴력을 끊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간다. 그들 대부분은 무언가 큰일을,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들 삶의 진실은 누구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이기 위함도 아니요, 어떤 영향을 미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참된 ‘나’로써 살아갈 때 바로 그런 ‘나’가 가장 아름답다.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며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바깥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이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정, 겸손과 절제, 과욕과 자기 현시욕을 다스리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물론 시인이 지닌 마음의 평정은 삶의 ‘정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력 넘치는 전진을 쉬지 않으면서 누리는 평온함이다.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안겨 있듯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시 131:2b). 젖 뗀 아이가 엄마 젖가슴에 안긴 것 같은 평온함, 그것은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흘러 넘치는 평온이다. 이 시인의 평온함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담겨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들의 것이다”(마 5:3).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무신론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면 될수록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했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를 예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투사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자기의 소중함을 모두 상상 속의 하나님에게 넘겨버림으로써 결국은 인간 소외, 자아 분열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포이에를바라에게 절대자는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곧 하나님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가 되었을 때, 결국 인간은 스스로 노예가 된다는 것이 역사가 증언하는 교훈이다. 인간이 주체가 되면 될수록 돌이킬 수 없는 인간 소외가 일어난다. 적개심, 분노, 불평, 미움, 증오, 갈등 등은 자신이 중심일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요즘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시민들의 눈에 비친 정치권의 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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