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양털을 얻기 위해 치는 양일 경우 목자는 자연스럽게 같은 양과 몇 년을 함께 살게 된다. 이럴 때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미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 못지않게 유대감이 깊게 된다. 목자는 양에게 이름을 지여 부를 정도로 양을 잘 알고, 양 또한 자신을 지켜주는 목자를 알고 따른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가서 안전을 확인하고, 위험이 닥치면 몸을 던져서 양을 구한다. 양들이 잘못된 길을 가면 바른 길로 인도하고, 길 잃은 양은 밤을 새워서 찾는다. 목자는 들에서 양과 함께 자고 먹으며 생활한다. 들에서 잘 때는 목자 자신이 문이 되어서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지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셨다. ‘문’이란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가능성’이다.(안병무) 폐쇄적이고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종교의 문을 예수께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하셨다는 뜻으로 하신 말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을 가로막는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 “너희가 문턱에 앉아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여보내지 않는다”(요 10:7-18)고 비판하셨다. 문이란 열기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다. 닫기 위해서도 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문은 열려 있지만,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여기서 히브리 신앙인은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를 말한다. 제사종교 시대에 양의 피는 성소에 뿌리고, 몸은 성문 밖에서 불태웠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양들을 위해서 ‘성문 밖’에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성문 밖’은 배척당한 자들이 버려지는 곳, 소외된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신앙인은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6)고 한다. 그곳에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질시 받는 사람일지라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성별시켜 주셨음을 믿고, 동료로 받아들여 살아야 한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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