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승 자 목사

행복은 사소한 곳에 숨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행복은 혼자 사는 곳에서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너와 내가 그리고 그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행복은 찾아온다. 그것은 과거를 생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의욕이 없다.

중세에는 신학과 기독교적 윤리가 사회적, 경제적 삶을 규정했다. 인간의 종교적 구원, 즉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이 모든 삶의 궁극적 목표였다. 때문에 지상에서의 경제적 삶이나, 그것을 위한 삶은 잠정적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도덕적, 종교적 질서가 세속적 삶이나, 경제적 필요에 선행했다. 경제적 사고는 전적으로 종교적 질서, 종교적 가치와 관습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삶을 소외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상에서의 삶이 천상에서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중 예정론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 구원으로 예정되거나,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된다고 했다. 예정 혹은 선택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야만, 그것을 감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정화받은 자만이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그에게 내 생명을 의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로마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 불과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까지 내 주셨다. 예수님은 첫째도 양떼, 둘째도 양떼 이었다. 예수님은 양들이 늑대에 의해서 강탈당하지 않도록 양떼를 지켜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어떠한가. 교인들은 어떠한가. 모두가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가 현재에 얽매여 미래,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를 통해 실현된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제어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행복해지려고 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고, 함께 할 때 행복하다. 우리는 거리를 걷다가 불쌍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지갑을 열어 몇푼을 꺼내 주었을 때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래서 사람은 과거를 생각하며, 영원한 그의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고, 따르는 이유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서는 절대로 갈 수 없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가야 한다. 우리가 틈만 나면 이웃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 때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고, 나의 삶이 풍성해진다. 

햇빛중앙교회, 본지 후원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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