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오스트리아 출신 이론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는 폭력(전쟁)의 근원에 대해 의미 있는 해석을 내 논 바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이 상징화의 능력에 있다며 전쟁의 근원이 이념 혹은 상징의 충돌이지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신이 된 심리학]). 재독 철학자 한병철 역시 유사한 해석을 내놓았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한병철, [타자의 추방], 2017. [햇순] 6호, 하태영, ‘적을 친구로 만드는 지도자’에서 인용 ).

원수에 대한 성경의 태도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음에도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원수를 갚지 말라”(레 19:18).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눅 6:35). ‘원수’는 누구인가. 칼 바르트에 의하면 “나를 미워하고 나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악을 악으로 보복하도록 요구하는 자”이다([로마서 강해]). 원수는 생래적인 존재가 아니다. 원수는 ‘이웃’으로서가 아닌 절대적으로 잊혀진 ‘타자’가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 정치적인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땅히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타자로 밀어냄으로써 우리 자신이 지금 밀어낸 사람들의 원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 원수만을 생각했지 ‘내가’ 이웃으로 수렴하지 않는 타자들의 원수가 되어 있음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원수는 나 밖에만 있지 않고 나 안에도 있다. 만일 내가 내 원수를 갚는다면 결국 나는 나에 대해서 원수가 된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는 행위는 바로 내게 하는 일이요, 내가 구원받은 일이다.

지금 한·일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아베 정부가 우리를 이웃으로 대하지 않겠다며 먼저 칼을 빼든 것이지만, 우리의 일본에 대한 태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럴 때 극단적인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도움이 안 된다. 아베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외교력이 절실한 때이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