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예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모두가 아는 얘기지만 그래도 이 얘기가 나온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율법사처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음으로서 이웃 사랑을 걸림돌로 만드는 버릇이 있다. 이웃 사랑을 조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반드시 조건 지어져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이좋은 관계를 화목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설명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라는 고통 속에서 차고 넘침으로서 그 결과를 두고 한 말이 ‘화목’이다(골 1:19-20). 때문에 주께서는 선행으로서 이웃 사랑이 아닌, 구원으로서 이웃 사랑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웃 사랑은 양의 문제도, 질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요 구원의 문제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듯이, 이웃 사랑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은 없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이보다 더 실제적인 교훈은 없을 것이다. 내 몸을 위해 큰돈을 쓰는 사람이나, 적은 돈을 쓰는 사람이나, 자기 몸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 내 몸이 아프면 고통을 감수하며 수술을 받기도 하듯,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에 잘못된 동료를 책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랑 핑계로 동료의 공인으로서의 잘못을 덮으려고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비로운 사람 행세를 하지만, 실은 사랑을 가장해서 이웃을 이용하려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만큼 혼탁한 시대이다. 누가 세상을 힘들게 하고 짜증스럽게 하는가? 자신을 ‘큰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더 큰 믿음’ ‘더 큰 사랑’ 이란 말은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붙인 수사일 뿐이다. 믿음은 같은 믿음이고, 사랑은 같은 사랑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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