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모세와 예수는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둘은 태어난 순간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유년시절은 둘 다 알려진 바 없다. 본격적인 임무를 맡기 전에 통과제의를 거친다. 대적자들에게 맞서서 백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 몸을 던진다. 마침내 목표를 성취한 듯 좌절과 절망 그리고 신비로운 죽음까지 천 년 이상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의 행적은 마치 한 사람의 서사처럼 포개진다. 여기서는 두 영웅의 등장과 함께 임무를 시작할 때 어떤 의식(ritual)을 거쳤으며 누가 그 권위를 부여했는지에 살펴본다.

구약에서 제사장(출 28:41; 레 8:12), 왕(삼상 10:1; 16:3; 왕상 19:16), 그리고 선지자를 세울 때(왕상 19:16)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다. 현재 이 전통은 목사 안수식과 사제 서품식에 상징적으로 남아있고 왕의 대관식이나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름을 붓는 예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1953년 6월 2일 영국 여왕 엘리자벳 2세의 즉위식을 들 수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 지오프리 피셔(Geoffrey Fisher)의 집례로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진행된 즉위식에서 여왕의 이마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예수의 경우 두 장면에서 희미한 암시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기름을 부으셨다”(눅 4:18; 사 61:1)는 구절을 낭독함으로써 자신이 곧 메시아로서 그 직임을 시작한다. 그것은 이사야의 인용일 뿐 실제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의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편 사도행전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증거한다(행 10:38; 4:27). 이 구절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성령과 능력을 묘사하였지 제사장이 집례한 성유의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과연 누가 기름을 부었을까? 사도행전에 따르면 구약의 전통에 따라 예수가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전한다(행 4:27). 복음서는 누가 언제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한 여인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는 사건에 눈길이 멈춘다(막 14:3; 마 26:7; 눅 7:37). 복음서마다 머리(마태, 마가)나 발(누가, 요한)의 차이는 있으나 유월절을 앞둔 어느 시점에 이름 모를 여인이 ‘나드 한 옥합’을 예수에게 부은 것은 공통적이다. 제사장이 아니라 선교 대상이 예수에게 성유의식을 베푼 것이다.
모세는 율법을 제정한 사람으로 성유의식과 관계없는 인물일까? 실상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다(신 34:10; 집회서 45:1-5; 행 3:22; 7:37). 엘리사처럼 누군가 기름을 그에게 부었을까? 어디에도 직접적인 기록이나 암시는 없다. ‘모세’는 투트모세, 라모세(람세스) 등처럼 이집트 통치자를 떠올리게 하는 상상력이 깃든 곁말(pun)로서 ‘물에서 구조하는 사람’이다. 그의 임무는 마치 거대한 바다 같은 대제국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다(사 63:11).<Propp, 153> 모세가 나일강에 유기된 것은 강력한 제국에 의한 익사상태를 암시한다. 이 점에서 바로의 딸이 모세를 구출했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자 반전이다. 모세의 부모는 그를 살리기 위해 나일강에 빠뜨렸으나 핍박의 주체랄 수 있는 바로의 딸이 모세를 구하고 ‘물에서 건져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모세는 파멸의 대상이었으나 적대자가 살려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등극하는 의식을 통과한 셈이다.

모세와 예수의 성유의식은 전통적인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왕, 제사장, 메시야의 성유의식은 예언자가 기름을 바르지만 두 영웅의 경우 적대적 대상(바로의 딸)과 선교 대상(이름 모를 여인)이 역설적으로 각각 해방자와 메시야로 성별한(consecrate) 것이다. 예수는 모세가 넘지 못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막 1:9; 마 3:13). 모세의 단절이 예수를 통하여 계승된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모세의 사명을 잇는다는 연속성을 보여주는 암시다(막 1:5). 모세(השׁמ)는 물의 공포에서 구원하고, 메시야(חישׁמ)는 부정(不淨)한 세상에서 기름을 발라 성별한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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