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이다. 받은 은혜만큼 행동해야 한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행동해야 한다. 근본주의와 원리주의 신학에 갇힌 대부분의 교회들은 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70-80년대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 그 결과 교회의 십자가 마을마다 없는 곳이 없다. 한 건물에 교회당이 2-3개도 볼 수 있었다.

구멍가게만큼이나 교회당이 흔했다. 당시 다방하나 생기면, 교회도 하나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혹자는 한국교회를 향해 축복을 받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당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교회당의 철탑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언제부터인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문제는 교회에 대한 신용과 기대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비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못하고,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비 콕스는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고 했다. 그만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하게 제기됐다. 요즘 한국교회가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지로 떠오르면서, “교회가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종교집단”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되면 교인 30% 아니 50%가 감소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상당수의 교인이 가나안 교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소식도 들려온다. 문을 닫는 교회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교계언론의 광고란에는 ‘후임자구함’광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눈에 띈다. 이것은 한마디로 행동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맡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교회란 본래 무엇이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행동해야 한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을 때, 존재의 가치가 크다. 그리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 종교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천상의 삶만을 외치다가 행동하는 종교, 사랑의 종교, 평화의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성서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서 한국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했는가를 묻고, 고민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한국교회가 가던 길을 멈추고,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있는 맑은 귀를 가져야 한다. 받은 은혜만큼 십자가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과 친구로 지냈다. 메시아인 예수님은 세리, 창녀, 문둥병자, 불구자, 귀신들린 자, 혈우병자 등과 어울리며, 이들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어린이들을 보고 천국이 이들의 것이라고 했다. 이들과 함께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 성서는 처절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이탈한 교회는 닫혀진 교회. 죽은 교회이다.

“성령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합일을 이루어야”
창조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지고 있다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들, 지위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모두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교파주의에 매몰돼 분열과 갈등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연합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연합단체 안에서도 서로 헐뜯고, 갈등을 일삼으며,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곧 사제들과 그들의 제의와 교리 때문이다”고 했다. 이 말은 계시종교도 시간이 경과하면,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이는 결국 자기 안에 갇히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은 신의 질서를 파괴한데서 온다”고 했다.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진다는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도 인간의 탐욕과 무질서가 만들어낸 재앙인 것은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친교를 나누고, 사귄다. 의로운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끼리, 죄인은 죄인끼리, 노예는 노예끼리, 같은 인종끼리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원칙이다. 교회는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성령 안에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합일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성서는 처절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목회자들도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과 교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서는 거룩한 하나님과 추한 죄인의 만남을 얘기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이들과의 사귐이 신앙의 원칙이다. 이럴 때 인간의 삶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교회는 인종적인 차이나,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계급과 신분을 넘어서서 종과 자유인이 한데 모여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는 곳이 교회이다. 성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끼리끼리 모이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목회자들도 만찬가지이다. 큰 교회 목회자끼리, 같은 교단의 목회자끼리, 박사목사끼리, 정치꾼끼리 모이는 곳이 바로 오늘날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도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자는 가난한자끼리 모여 반목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교회는 분명과 갈등으로 점철되고,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소송사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회의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보다도, 소송비용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교회에 대해서 희망을 걸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이는 집단으로 변질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사교집단으로 변질된 결과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들이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잊었다. 교회는 자기 안에 갇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교회의 문턱은 높아지고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교회라고 말 할 수 없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사랑하는 곳이다.

오늘 교회에 사랑이 넘친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다. 평화와 생명도 없다. 서로 반목하며, 갈등을 조장하는 집단이 됐다.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70년대와 80년대 초 교회를 찾았던 노동자들은 천주교회를 거쳐 불교를 찾았다가 여기서마저 외면당했다. 이들이 종교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어야 할 종교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행복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항상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섰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크게 봤다.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면 어께에 메고 돌아와 기쁨의 잔치를 열었다.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계산을 하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또 채워진다는 계산을 한다.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계산이다. 개인의 욕심이 채워지면, 자기 가정의 행복이 이뤄지면, 세상은 어찌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뿐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행동은 어리석게만 여겨질 것이다. 비합리적인 계산은 어리석지만. 초월적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초월적인 사랑은 어리석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잃어버린 자를 그대로 버려두고서는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인간 이하라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며, 이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언제인가 무너진다. 결속된 유대를 포기한 공동체는 해체된다. 한사람의 아픔에 동정하지 않으면, 죽은 공동체이다. 무능한 인간, 보잘 것 없는 인간, 버림받은 인간을 어떻게 돌봐 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름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성장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교회

한사람을 버리는 공동체는 100사람도 버릴 수 있다. 정신박약아. 불구자, 고통 받는 사람을 감싸줄 때 교회는 성장한다. 이들을 안아주는 이들은, 이들을 구원한다기보다도,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우리사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 구원받고, 충성해진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세상의 하나님나라가 완성된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초월적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다.

이러한 사랑을 증거하고, 행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참교회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며, 닫혀진 교회이다.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자기들 안에 갇혀 이웃을 돌보지 않는 교회는 닫혀진 교회이다. 죽은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았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서 기쁨이 넘친다. 보람을 찾는다.

교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자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이다. 오늘 교회 내에 이런 인간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데 안타깝다. 교회는 자기 욕심을 죽이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리는 곳이다. 우리의 몸까지 받쳐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를 받쳐야 한다. 우리의; 삶 원천이다. 하나님에게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초대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살았다. 가진 것을 모두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처절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실현하는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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