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탄의 계절은 돌아왔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자영업자들은 가게의 문을 닫고, 노숙자와 어르신들을 위한 밥상공동체도 문을 걸어 잠갔다. 모두가 힘든 성탄의 계절,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했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울린다. 하지만 사랑의 온도계는 좀처럼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성탄 의미 되새길 마음의 자세 중요

성탄절은 세계적인 명절임에 틀림없다. 인류 모두가 기쁘고 유쾌하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환락 속에서 본능을 발산하는 성탄절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이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성탄절의 뜻을 되새기며, 정화된 마음으로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동정녀 탄생’, ‘예수라는 이름’, ‘임마누엘’ 등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즉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다가 주었다.

억압과 수탈의 체제 속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가 열리지 않는다. 미래가 없다. 전 한신대 교수 박재순 목사는 “구원은 주어진 체제 밖에서, 본능과 습관의 굴레를 벗어날 때 비로소 열린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메시아사상이 나올 수 없다”고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년, 도서출판 천지>에서 밝혔다. 즉 억압과 수탈의 체제서 해방돼, 닫쳐진 사회, 닫쳐진 역사를 연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밖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얘기다.

예수(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구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담겨져 있다. 자기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의 백성과 결부되어 있다.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을 의미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율법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과 계약을 맺었다. 자유인은 정의와 사랑으로 통치 할 수 있지만, 노예로 산 사람은 자유, 정의, 사랑으로 통치 할 수 없다. 이들은 강제적으로 통치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율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은 성숙한 사람을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이들이 인간사회를 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빛도 없이 일하는 노동자, 정쟁·다툼의 정치인·목회자보다 거룩하다”
삶에 대한 감사·기쁨으로 소외된 이웃과 함께 새로운 미래 열어야

하나님의 통치, 이 땅에 평화 정착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과 종교인, 권력을 가진 관료, 이들과 악어와 악어새가 되어버린 언론인들에게 정의로 오신,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필요하겠는가. 이들에게는 이들이 그토록 찬양한 파쇼정권이 필요하다. 이들은 강압적으로 억눌러야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뼈저리게 느꼈다.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과 종교인에게서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은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를 저버렸다. 그래서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인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랑과 정의 공동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예언자들이 고발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수탈을 일삼으며, 거짓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스스로 거부했다. 불의한 왕이나, 지배계층의 억압과 수탈 속에 신음하거나, 나라를 잃고 이민족의 압제 속에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죄를 지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사랑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았다. 결국 목자 잃은 양떼가 되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교육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통치한다. 이 같은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웃나라의 침략에도, 한 번도 하나님의 통치를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하나님이라면, 북한민족의 하나님이며, 세계민족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세계민족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그의 나라를 갈망하며, 그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힘에 의해 하나님의 질서가 파괴되고, 가진자들에 의해 불의와 거짓이 판치고 있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져다가 준 평등한 세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맞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직접 통치 할 때 억압과 착취, 불의와 거짓이 사라지고 평등한 세상이 온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로마 등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침략 앞에서 나온 희망의 메시지이다. 1천년동안 나라 잃고, 주변 강대국의 지배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 고난과 시련을 겪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마누엘의 현실로서 그리스도는 탄생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평화의 소식’을 전해 줄 것으로 소망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과 항상 죽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 보다 낳은 삶을 위해 조국을 떠나는 이주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약소국가 국민들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굳게 닫쳐진 사회, 정의가 실종된 사회, 상처투성이인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의 탄생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아픔을 동반한다,

성탄절을 더 이상 모독하지 말라

아기 예수는 가장 미천한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자기 안에 갇힌 욕심 많은 사람과 권력을 가진자들이 자리를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는 짐승 곁에서 태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정·지위·소유를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기 예수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참담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 안에 갇혀 코로나19로, 노동현장서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다.

헤롯은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가장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해롯의 권력과 지위를 위태롭게 했다. 헤롯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부근 두 살 아래의 아기 모두를 살해했다. 아기를 잃은 부모들의 한의 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이 이야기는 역사의 갈등과 비극의 깊이를 드러낸다. 예수님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깊은 고통과 결부되어 있다.

당시 로마제국에 의한 평화는 창과 칼에 의한 평화(팍스)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얻은 평화이다. 압제와 수탈을 강요하는 평화였다. 이런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평화, 팍스이다. 우리민족도 일제 치하와 군사독제정권 아래서 철저하게 경험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 ‘힘에 의한 평화’(팍스)의 소리만 곳곳에서 들여온다. 특히 목회자와 교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평화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평화, 샬롬은 아니다. 로마평화(팍스)를 외친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님의 평화를 외쳤다면, 역사 앞에, 하나님 앞에 죄인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힌 이들은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데도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다. 성탄의 계절, 12월이 쓸쓸한 이유이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는 가진자와 권력자, 강대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거짓된 평화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렸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런 거짓된 평화를 깨고 진정한 평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평화에로 이르는 길을 열었다. 이처럼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의 고통, 사무친 한과 결부되어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억압과 불의에 대한 항거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심지어 6.25전쟁 중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도 열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불의한 정권의 충견노릇을 자처했다.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며 고난당하는 이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는 일제하에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도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천왕을 섬기는 일본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잊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과 역사 앞에 큰 죄인이 되었고,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와 교인은 강대국 권력을 숭상하며, 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화려하고 요란한 것이 아니다. 초라하고 조용하게 박해를 받는다. 성탄의 계절, 12월에 술과 환락 속에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성탄절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렇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50%의 국민은 생계곤란을 겪고 있는 등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국민은 술과 환락으로 아기 예수를 모독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도 동참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겸손이 바로 힘이고 권력이다

이런 상황서 성탄절 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들뜬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리고, 보내는 것은 한마디로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격에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러한 재정은 빚진 자에게 돌려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면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것은 거짓 평화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일어버린 결과,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퇴색되었다. 그렇다보니 세상은 술과 환락에 빠져들었고, 혼란과 고통 속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은 더해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조용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이웃과 나누며, 고통스러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서로를 축복해 주는 성탄절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현존하는 메시아는 장차 오실 메시아와 연속되어 있다. 메시아의 표상은 고난가운데 패배자의 모습이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오늘도 누추한 곳에서 역사하고 계시다. 다윗은 성전 건축계획을 세웠다. 이 때 하나님은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교회당을 지어 달라고 했느냐”고 책망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과 만용을 위해서 화려한 성전건축을 단행했다. 하나님은 이를 버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네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들에서 노숙하는 너를 왕으로 세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위해 절제되고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는 자기 뜻을 관철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가 아니다.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을 구원 할 메시아이며, 인류에게 소망을 가져다가 줄 희망의 메시아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상대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풍토가 됐다. 그러면서 자신은 목사이고, 장로라고 말한다. 자신의 밑에 있던 여자직원을 농락하고서도 양의 가면을 쓰고 연합운동의 현장에 나와 아무렇지 않게 연합사업에 참여한다. 자신들이 이단과 깊숙이 관여되어 있으면서, 참 신앙인의 가면을 쓰고 상대를 음해한다. 이들이 바로 목사이고, 장로이다. 한국교회를 정화하겠다고 나선 언론인이다.

이들은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기다릴 자격이 없다. 이들이 있는 한 한국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깊이는 깊어만 간다. 마음이 정화된 사람만이 아기 예수를 기다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된 사람들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한국교회가 문제의 단체로 지목한 교단, 교회, 인물들과 관련된 정치꾼들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연합사업의 현장은 분열과 갈등을 치유 할 수 없다.

양의 탈을 쓰고 분열의 중심에 선 목사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1)말씀이라 칭하더라/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장11-16절)

장차 오실 메시아는 충신과 진실, 공의로 심판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했다. 창과 칼이 아니라 공의로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승리하신 분이다. 약함을 통해서 강한 힘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저마다 이름을 빛내는데 안간힘을 쓴다. 자신이 힘 있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민 모두가 고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데, 목사들은 보수연합기관 통합을 둘러싸고 돈부터 계산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다. 교회가 힘이 있으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한다. 나약 할 때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을 발휘 할 수 있다. 교회 아니 그리스도인들은 나약 할 때 세상에서 소금의 맛을, 빛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자. 겸손이 바로 힘이고, 권력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행동으로 옮긴다.

성서에 나타난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준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 종교인들에게 정의로 오시는 메시아가 필요하지 않다. 이들에게는 돈과 힘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파쇼정권이 필요하다. 이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르지 않고서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인이어야 한다. 자유인은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성서는 노예로 산 사람을 자유와 정의, 사랑으로 통치할 수 없어서, 율법을 주었다. 세상은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사람이 있다. 자식도 자랑스러운 자식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자식이 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데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참사랑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참사랑은 용광로를 녹일 수 있다. 소강석 목사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곤궁한 가운데 있는 국민을 위로하고,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것은 교회의 몫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공산주의자 아니 간첩으로 몰린 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헌데 한국교회는 이들을 밀어내고, 적으로 규정했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사회, 평등한 사회를 교회 스스로 거부한다. 박해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데는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하루벌어 하루를 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자, 불구자들과 함께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사랑이 필요없다.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 전하는 성탄절

예수님은 하루 벌어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자, 불구자들과 함께 뒹굴고, 밥상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에 짐이 되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메시아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목회자와 교인, 교회에 짐이 되고 있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보호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웃을 감쌌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을 돌보고, 참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70년동안 북한동포를 증오하며 살아왔다. 증오와 원한으로는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적인 민족통일,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북한동포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2021년도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닌가.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데 있다. 말로만이 아니라, 말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노동현장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조국을 떠나 타국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주민에게, 이웃의 손길을 기다리는 소외된 사람에게, 분단의 아픔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성탄절을 떠나 평소에도 그러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탄절을 맞을 자격이 있다. 지금 고통당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예수의 길에서 이탈했다. 돌로 만든 떡을 먹어 인정공동체에 참여 할 자격이 없다. 소외된 이웃을 사랑 할 자격도 없다. 이들은 1달란트 받은 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세상은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사랑을 나누고, 평등한 세상을 이룰 때 비로소 실현된다,

과거 이른 새벽 청소하러 나왔던 청소부가 자동차에 치어 숨졌다는 보도. 남편대신 청소하러 나왔던 청소부의 부인, 형을 대신해서 청소하러 나왔던 청소부의 동생이 차에 치어 사망했다는 보도를 보고, 아무 느낌이 없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이 죽은 세상이며, 모두가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정 없는 삭막한 세상이다. 청소부들의 성실한 삶은 모든 사람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이들이 하루라도 쉬면 이 세상은 쓰레기로 뒤 덥혀 걸어 다니지도 못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또한 코로나19 펜데믹 속에서 우편배달부의 죽음, 택배기사의 죽음,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감정이 굳어버린 오늘 사회를 그대로 말해준다. 언제 교회가 이들의 맑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번 해 주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쟁에 휩싸여 싸움만 하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한다면, 우리세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공무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국민들에게 봉사했다면, 나라는 매우 행복해졌을 것이다. 직상 상사들이 부하직원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정의와 공의가 넘쳐흐르는 건강한 사회로 발전했을 것이다.

교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남는 예산을 이들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줄 것이다. 이들의 삶은 순전히 남을 위한 삶이었다. 우리에게 생명의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는 농민,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높은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택배기사, 우리의 입을 옷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쟁과 다툼을 벌이는 정치인과 목회자보다 거룩하다. 돈과 권력에 붙어 교회와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교회언론인보다 정직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들은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천대를 받고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최저임금만 받고 일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자이다. 2020년 성탄절을 맞은 우리 모두는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평화(샬롬)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고난당하는 사람과 굶주린 사람, 소외된 사람의 손을 붙잡지 않고서는 성탄의 계절에 그리스도를 맞을 자격이 없다. 이제 우리는 정쟁만 일삼으면서 국민들에게 피곤함만 주는 정치인, 분열과 갈등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교회지도자들을 향해, 정의와 사랑을 받아드리라고 촉구하자. 불의와 거짓을 일삼는 권력에 항거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자. 이것이 예수의 길이며, 그의 제자된 그리스도인들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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