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한 필

당신한테 오고간 길 감으면
비단 한 필은 족히 나올 터.

이젠 슬며시
손을 놓으셔도...

내 머리 위 오리나무 하늘에
마구 길을 내는 새를 따라가셔도...

가시는 숲 어디인지
주소 주지 않으셔도...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놀 바라보는 하늘은 하나.

이 비단 한 필이면
어느 마을 살아도 마음거지는 면할 터.

비단 올올이 풀리는 추억만 감아도
이 생에서는 다 감지 못할 터...

* 감태준: 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전 『현대문학』 주간. 『시와 함께』 편집인

▲ 정 재 영 장로

사랑하는 대상과의 별리를 다루고 있다. 첫 연에 나오는 ‘당신’은 남녀 관계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 가치 즉 사랑했던 것들의 총체적 이름으로 받아들일 때 읽는 사람 감정이 절절함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것은 소위 화자와 독자의 동일화 감각이다. 이것은 바로 시의 특징이자 생명인 애매성을 말한다.
당신과 관계는 비유된 비단길이다. 비단이라는 사물, 부드럽고 고가의 귀중품 비유를 통해 그 존재에 대한 최고의 미적 고백임을 내재하고 있다.

2연의 단절이 화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동적으로 대상에게 있음을 알게 해준다. 즉 상대가 떠남이다. 불가피성이다.

이어지는 연에서 볼 때 이별의 형태는 새를 따라가는 일이다. 즉 하늘을 향한 떠남이다. 떠나는 지향점이나 목적지는 알 수 없는 곳이다. 다만 새가 허공으로 가는 것이 아닌 ‘숲’이라는 긍정적인 말로 함축하는 면에서 부정적인 퇴행의 별리는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별리는 가슴 아프지만 그것은 대상 입장에서 납득이나 이해가 가는 운명적인 점을 내포하고 있다.

저녁놀로 은유한 하늘은 종말론적 비유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운명적 순간에서 화자는 추억을 돌이켜 봄으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떠나면서도 남기는 모든 추억은 비단 한 필처럼 귀한 것이다.

별리는 아쉬운 아픔이지만, 남은 추억은 영원성의 아름다움을 말함으로, 화자의 세상에 대한 선한 시각을 미루어 알게 해준다. 시인의 아름다운 심성을 추론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조차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처럼 별리의 아픔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면을 상기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에 나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 이론이 여전히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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