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일본 나라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위),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기독교 성도들(아래).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호흡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교회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 굴절된 역사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의 우상숭배적 신사참배와 교인들 헌금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부일행위 등이다.

이러한 굴절된 역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경우가 많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굴절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다듬을 여유도 없이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제대로 지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병폐현상과 위기의 목소리는 대부분 여기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우상숭배적 신사참배와 친일의 역사를 반성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우상숭배적 신사참배 결의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초부터 관공립학교는 물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적극적인 신사정책과 종교 통제 정책을 폈다. 특히 1938년 초부터 일제는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경찰력을 동원하여 신사참배와 국가의식을 강요하고, 개 교회는 물론 장로회 노회와 총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실행하도록 강요했다.

가장 먼저 노회적 차원에서 신사참배 실시를 가결한 곳은 1938년 2월 3일부터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였다. 이 노회에서 종교교육부가 제안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한 일”을 여타 제안과 함께 가결했다. 이후 같은 해 8월 31일 사이에 국내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또 1938년 9월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장로교 27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감리교회는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감리교회의 수장이었던 양주삼 총리사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총독부의 설득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여 1936년 4월 10일자〈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함으로써 신사참배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양주삼 총리사는 1938년 9월 3일에도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통고문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그해 10월 5일부터 열린 제3회 조선감리회 총회에서 공식순서에 ‘애국일 실시’를 넣고 총회 제3일째인 10월 7일 오후에 배재중학교 운동장에서 양주삼 총리사의 사회로 ‘애국일’ 행사를 치른 다음 참석자 일동이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구세군에서도 1938년 7월 29일자로 토마스 윌슨 사령관이 각지 소대장들에게 ‘구세군률을 초월한 통첩’을 내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할 것을 명령했다.

△예배의식에 ‘국민의례’ 도입
1938년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제34회 평양노회에서는 특별순서로 “1. 국기게양, 2. 황거요배, 3. 출정군인 위해 기도, 헌금 일금 100원, 4. 애국예배, 5. 출전황군 위문문 발송” 순서를 가졌다.

1939년 5월 3일부터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열린 감리교회 제7회 서부, 중부, 동부 합동연회에서도 총리사와 각 지방 감리사 일동이 개회에 앞서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개회식에서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송, 궁성요배, 전몰상이장병 유족을 위한 묵도 등 이른바 ‘국민의례’를 실시했다.

성결교회도 1939년 9월 20일부터 경성성서학원에서 개최되었던 제2회 연회의 결의에 따라 그해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대강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 결성식’을 가질 때 예배의식 첫 부분에 ‘국민의례’의 순서를 넣고 있다.

구세군에서도 1938년 7월 29일자로 토마스 윌슨 사령관이 각지 소대장들에게 ‘구세군률을 초월한 통첩’을 내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할 것을 명령’하면서 “1. 매주일 아침 장년집합 직전에 황국신민 서사를 엄숙히 제송할 것, 2. 국기게양을 할 것, 3. 국가를 제창할 것, 4. 황거요배를 할 것” 등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국민의례’는 처음에는 특별행사에서만 행해졌지만, 1940년대에는 일반 예배의식의 맨 앞에 넣어 매 예배 때마다 실행했다.

△교인들 헌금으로 침략전쟁에 협력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으로 부일행위를 했다. 성전이라는 이름의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000원을 모아 바쳤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에 열린 제42회 총회의 보고를 보면 장로교단은 교회당 종 1540개와 유기 2165점과 12만여원을 모으고 마련하여 일제에 바쳤다.

감리교회는 1944년에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세 대를 살 수 있는 돈 21만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성도의 헌금 전액과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에 따랐다.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 교회는 연맹회비를 한 사람당 20원씩 받았다. 교회는 이렇게 받은 회비, 헌금 등을 가지고 일제의 병기 구입에 사용하라고 헌납했다. 병기 헌납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한국교회는 앞 다투어 전승축하기도회를 가졌고, 위문품을 보냈다. 기독교 인사들은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김활란, 백낙준 등은 이곳저곳에 강연하러 다니면서 조선의 젊은 남녀들에게 일제의 전선에 나가 그 애국적 정열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고 외쳤다.

△한국교회 전체의 반성과 회개 절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둘러싼 교회와 목사, 성도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신앙 관계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덮어두었거나, 언급을 회피하며 그 죄의 심각성에 대해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장로교 제39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를 잠깐 다룬 적이 있지만,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청산되지 않는 문제가 교회 내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죄를 방치한 채로 달려왔고,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는 남북의 분열, 교회와 국가 내에서의 동서의 분열, 교단 내에서 분열,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나뉘는 분열의 역사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또한 친일 인사들은 해방 후에도 계속 교계의 요직에 올라앉아 우상 숭배에 대해 합리화하는 교묘한 발언들을 하며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회개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독선이나 정죄라는 말로 그냥 넘겨버렸다. 때로는 일제 치하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순교자들을 싸잡아 광신자로 취급하기도 하였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다가 투옥된 목회자와 성도를 교회의 조직을 무너뜨리고 갈려나간 교회 분열의 원인 제공자로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교회가 저지른 행위가 세속 권력에 영합하고, 추종하여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하고, 교회의 사회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했으며, 교인들은 물론 다른 일반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내몰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한, 일제의 침략 전쟁 협력 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는 물론,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오늘 한국사회는 총체적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그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커다란 위기는 역사의 위기이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거사 정리를 매듭짓지 못하고, 그 연장선에서 오늘까지 이른 한국교회는 무엇이 바른 역사이며 누가 역사의 주체인가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다. 이제라도 한국교회 전체의 반성과 회개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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