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고 현 목사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4)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우리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6. 25한국전쟁 당시,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가 있다. 일명 지게부대(A Frame Army)이다. 공식 부대명칭은 노무부대, 지게부대로 더 알려져 있다.

지게는,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도구이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할 단어가 마땅히 없다. 그래서, 지게의 모양의 알파벳 A같이 보인다고 해서 'A 프레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에이 프레임 아미'(A Frame Army)를 줄여서 'AFA'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라고 불렸다. 총이 아닌 지게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이 부대는 전투를 수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부대였다.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였다.

탄약이나 식량 등의 후방지원을 하는데 투입되었다. 왜? 보급차량을 두고 지게를 맨 사람들이 투입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나라의 지형이,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산꼭대기까지 탄약을 지급해야 하고, 식량을 보급해야 했다. 이 일은 보급차량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투입된 부대가 바로 지게부대이다. 탄약이나, 식량 뿐 아니라 부상병도 이송했다. 우리나라 지게꾼은 놀랍다. 지금도 지게꾼이 있다면 '세 상에 이런 일'에 나올만 한 인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지게에 산더미만한 짐을 예사로 실어 나르고, 쌀가마니도 짊어지고 다녔다. 쌀가마니라고 해서 지금의 20kg 짜리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쌀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에는 쌀 한가마니가 80kg이었다. 치열한 전투속에 각 부대에 보급품을 보내려면 당연히 많은 수의 지게 부대원이, 필요했다. 1951년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때까지 약 30만명이 지게부대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징집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개부대는 중장년층이 주를 이루었다. 한국인의 지게를 지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옛날에 시골에 가보면, 젊은 사람들이 못지는 지게를 노인들이 번쩍 지고 일어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지게는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히려 장년층들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지게 부대원은 전투가 치열한 전방에서 맹활약했다. 당연히 사망자나 부상자도 많았다.

게다가 전투병이 아니라 스스로 방어를 할 수도 없었다. 2천명의 사망자와 2천명의 실종자, 4천명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집계됐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더 피해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미군 사령관은 매일 10마일 정도 떨어진 지점의 고지로 100파운드 정도의 보급품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 사(傾斜)진 산길을 약16킬로미터(40리 길) 거리를 약45kg 무게의 보급품을 운반했다고 증언한다.

실로 이 무게는 울통불통하고 비탈진 산길에 16km(40리)길을 걸어 다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도 할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이러한 일은 수행한,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서양인들보다 작은 체구로 적진의 포탄을 뚫고 무거운 보급품을 운반했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이 <음지>에서 일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그것은 전쟁에 참가했지만 전투요원이 아니라 노무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들은 6.25전쟁 당시 <음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한 병참부대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크게 달라지고 있는데, <음지>에서 이름도, 군번 없이 전투한 숨은 전쟁영웅, 지게부대요원들은 이름도, 빛도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들의 명예회복을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를 위한 애국심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한교연 총무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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