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알렌 보사크’(Allan Aubrey Boesak 1946~)는 남아프리카 흑인인권운동에 기수로써 조국의 민중들과 밀접하게 일체와 되고 있으며 아름다운 인간성을 지닌 뛰어난 설교자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목회적 관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설교들은 오랫동안 남아프리카 백인들에 의해 억압당해온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경험을 중점으로 반영하고 있음이 그의 고난의 구조 설교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돌보는 것조차 거부당한 한 어머니, 철거반원의 급습으로 모진 날씨에 내동댕이쳐진 한 이름 모를 흑인노파, 직업시장과 사회에서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하게 경쟁하지 못하도록 보장하고 있는 교육제도 등에 항의 하여 경찰의 협박과 맞선 무명의 젊고 어린 흑인 학생들, 이들이 그의 설교들 속에서 청중이 만나는 사람들이다. 그의 설교 속에서 고통 받는 흑인민중들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절규 한다.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13:2)

그렇다고 해서 이들 고난당하는 개인들이 그의 설교 속에서 하나의 일화적인 차원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설교가 흑인들에게 이 역할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그는 설교의 본질적인 특성, 즉 그들의 신학적 특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의 설교들은 흑인들이 실제로 삶 속에 배여 있는 것. 이를 태면 매일 매일의 민중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신학을 대변한다. 그의 신학은 그런 일화들을 통해 형성 발전되는 “밑으로 부터의 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남아프리카 흑인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격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흑인들의 경험은 그들이 전에는 들을 귀가 없어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그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나사렛 선언’(눅4:18-19)과 같이 그 하나님의 말씀은 속박 속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억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석방을,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는 자들에게 빛을, 죽음 한 복판에서 죽지 못해 사는 자들에게 생명을, 가난 속에 사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다. 그들의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상황에 빛을 던져준다. 말하자면 그 하나님의 말씀은 남아프리카 흑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진정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꾸준히 추구하도록 한다.

그는 ‘종교개혁가들’이 16C에 이룩한 고전 신학체계에도 유식 하였으며, 백인 아프리카 교회들의 왜곡되고 일탈된 가르침과 관행으로부터 종교개혁의 전신과 통찰을 살려내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또한 자신을 제네바의 ‘존 칼빈(John Calvin)과 연결된 개혁운동과 일치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충실한 발전을 대변하며 지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백인교회들은 남아프리카의 모든 흑인민중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인종차별정책, 사회의 ’분리 발전‘ 모델을 산출한다.(참고 : 신동아 1987년 1월호 별책부록 ’장상‘)
광복 68주년을 맞이한 우리 한국교회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 거부와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잃어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개혁신학? 복음신학? 자유신학? 해방신학? 그렇다면 일제에 굴종하며 신사 참배를 조장한 자들의 신학은? 그리고 우리 신학의 현주소는?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마 23:2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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