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 택 목사
김 정 택 목사

별다른 지파가 누구냐면 히 7:12-13절에 제사 직분이 변역 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며 레위 지파 말고 다른 지파를 말함인데, 열두 지파 중에 레위 지파만 제단 일을 하지만 한 번도 제단 일을 하지 않은 지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14절에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 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라는 것은 제단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는 구약의 레위 지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별다른 지파, 즉 별다른 지파인 예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약으로 레위 지파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유다 지파에 대하여 어떻게 제사를 어떻게 지내라고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약이라는 것이고, 진짜 제사장은 예수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예수께 드리는 것이고, 그래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더 보기 위하여 말라기 3장을 보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라기서는 미래에 되어질 예언서이기 때문에 말라기서를 구약으로 보면 안 된다. 사람(학자, 목회자)들이 말라기서를 구약으로 보기 때문에 십일조는 구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1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며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사자를 보내어 길을 예비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길을 예비한다고 하니 초림의 예수로 보고 사자를 세례요한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사 40:3절에서 사자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시 오시는 예수, 즉 재림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한다.

어째서 재림으로 보냐면 2절에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며 그의 임하는 날은 예수께서 홀연히 임한다는 것인데, 그가 나타날 때 누가 능히 설 수 있냐는 것이다. 초림의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죄인도 그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금을 연단 하는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다는 것은 초림은 이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을 연단 하는 불이 어떤 불이냐면 말 4: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며 극렬한 풀무불은 금을 연단 하는 불로써 이처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오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초개와 같이 타버리기 때문에 이런 자들은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림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초림의 예수 앞에는 누구나 설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에서 그 앞에 누가 서리요라는 말은 재림 예수가 오실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예비하는 사자가 길을 예비한다는 것으로 초림도 사자를 먼저 보내어 길을 예비하고 예수께서 오신 것처럼 재림도 마찬가지로 길을 예비시켜놓고 오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서 길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면 말 4:5절에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며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이라는 것은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으로 심판 날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것은 죽었던 엘리야를 살려서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6절에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며 돌이키게 한다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으로 초림 때도 세례요한이 회개하라며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던 것처럼 재림도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기서는 초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말라기서의 십일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합동총회신학신대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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