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환 목사
김 명 환 목사

인간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물질의 증식을 멈추지 않았다. 제의적 성격의 물질은 기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생계걱정을 하다가 3모자가 죽어도, 탈북민 모자가 죽어도 아무 감동이 없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초대교회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은 유대교 과부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과부들의 고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은 물질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의적 물질에 대해서는 소홀이 했다. 초기 로마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였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했다. 교회재정의 10/1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고리대금도 철저하게 금지했다. 

물질에 의존하는 사회는 망한다. 그래서 나누는 제의적 성격의 물질이 필요하다. 헌데 오늘날 교회는 유대인와 마찬가지로 제의적인 물질을 상실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져 물질 증식을 위해서만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내에서의 가난한 사람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 이탈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한 교인들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이탈한다. 그렇다 성서의 진리에서 이탈한 교회는 위기에 닥치고, 닥칠 수밖에 없다. 

분열과 다툼만이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교회는 기적을 기다린다. 속옷까지 빼앗아 교회를 건축한다. 기적은 그냥 오지를 않는다. 야웨를 섬겨야 할 이스라엘민족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은 맘몬과 바벨, 바알을 숭상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며, 막연한 기적에 빠져 있었다. 이때 엘리야가 나타나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고 고백한다. 

엘리야는 죽기로 각오하고 야합 왕에게 맞섰다. 야합 왕은 자신의 사제들을 불러 오랜 가몸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도록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비를 내리게 하는 이는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가마귀가 날아다가 주는 떡과 물로 연명하며 살았다. 바알의 본고장에서 엘리아를 맞이한 사람은 과부였다. 이 과부는 마지막 남은 양식을 엘리야에게 대접했다. 이 과부는 평생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 보았다. 

엘리야로 하여금 이 과부는 구원을 받았다. 엘리야는 절박한 사람을 구원했다. 엘리야는 이 과부를 통해 양식과 물을 공급해주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들음으로써 양식과 물이 채워지는 기적이을 체험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남은 양식을 먹고 죽으려고 했던 과부를 살리셨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34-44절에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나온다.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도 12광주리가 남긴 기적을 일으켰다. 제의적 성격을 지닌 양식,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의적 성격의 물질은 큰 기적을 일으킨다. 죽음 직전에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진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의 제의적 성격의 물질은 매우 부족하다. 자본주의적 물질만 보인다. 

말씀으로 무장된 제의적 물질은 절대로 썩지 않는다. 반면 제의적 성격을 잃어버린 물질은 곳곳에서 썩고 있다. 악취만 풍긴다, 제의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물질만 증식시키는 교회는 유대교에 맞서 싸울 수 없다. 교양인으로 대충대충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눈에 잘 띈다. 제의적 성격을 지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제의적 성격의 교인들은 함깨 건강한 신앙공동체를 이룬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예수님은 함께 나누는 제의적 성격의 밥상공동체를 강조하고 계시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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