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 강 목사
오 수 강 목사

이년 가까이 대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위세가 꺽일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방역해도 바이러스는 변이와 돌파 감염을 일으켜 방역 당국과 의료진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심지어 해외 파병을 한 청해부대원들이 약 90%(?) 대원이 현지에서 확진되어 군의 사기 진작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국민들은 걱정했었다.   사회가 기상천외한 질병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가족들과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방역당국에 끌려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본래 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름 모를 병으로 치유가 어려운 자들에게 병으로부터 해방을 주는 치유행위가 있다. 에니미즘이나 토테미즘 시대에는 주술사들이 병을 치유한다는 믿음이 강해서 환자와 가족들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병이 들면 먼저 주술사를 찾아 의뢰하는 것이 부족들의 치유방법이었다. 고등종교인 기독교가 선교 된 이후 초기 기독교의 행태 중에 하나는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기 전, 약을 복용하기 전 먼저 교회를 찾거나 교역자를 찾아 기도로 치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개중에는 신앙심으로 치유(?) 된 경우도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당시는 약국이나 병 의원이 그리 흔한 시대가 아니다 보니 교회를 지도하는 교역자에게 하나님의 신비한 치유의 은사를 기대하는 신앙심이 강했다. 따라서 민간 신앙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인간과 바이러스간의 전쟁은 항상 바이러스가 먼저 칼을 빼면 인간은 나중에 방패(백신)를 만들어 방어하려고 한다. 인간은 변종 바이러스를 모른다. 이번 코로나 19의 델타 변이와 돌파 감염의 칼끝이 인간의 지식을 겨냥하였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지혜는 방패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들은 미리미리 바이러스에 대한 방패를 만들어 놓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재촉할지는 몰라도 안타깝게도 인간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그 튀는 방향을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현대 기독교와 치병의 관계가 이제는 내리막길에 서 있지 않은지 의문이다. 초기교회 시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사를 전수 받은 제자들과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와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병자들을 구원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가는 도중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을 만나 그는 돈을 얻을까 처다보는 그에게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8)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을잡아 일으키니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만병의 치료와 영혼까지 구원했다. 야고보서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이처럼 초기교회 시대에는 치병과 치유의 역사함을 당연시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회의 치유 사역이 세속적인 생각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교회가 일반 종교단체와 비슷한 모습이 아닌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분석하면 교회의 성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세속적인 면만 남아 영적 기능이 상실했지 않느냐이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들의 영적인 기능이 퇴화하고 신자들의 신앙이 의식화되어  있어 믿음과 신앙이 바리새적으로 변질 된 것에 그 원인을 들 수도 있다. 기독교가 보이는 종교의 구성은 잘 되었을지 몰라도 초기교회의 영적인 신성이 잠수하여 겉모습은 교회로 볼 수 있지만 속은 본래 교회의 신성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성경대로 회복하기 위해선 먼저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진리를 잃어버린 자리를 찾아야 한다.

치유의 역사 본래 자리는 지도자들이 신의 성품으로 회복한 자리다. 강도 만난자를 보고도 못본체 하고 피해 도망간 제사장(목회자?)과 레위인(기독교도?)의 자리가 아니다. 구제로 생명을 살려 준 사마리아인(거듭난 지도자와 신자)의 거룩한 행실의 자리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돈을 많이 들여 거창한 건물로 위용을 드러내려고 하는 세속적인 명예와 권위의 자리가 아니다. 초라한 건물이라도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 진정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그 자리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위용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공, 성장한 교회 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순종하느냐 하는 그 자리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위상을 세운 초기교회, 성령의 능력이 회복된 자리를 이룬 몸 된 교회라야 치유의 능력도 살아난다. 문제는 교회의 세속적 부의 영광을 버림과 공들여 지은 교회 건물을 처분할 수 있는 십자가를 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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