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사에 역설적인 사건, 즉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다. 우선 서양 문물의 도입을 미룬다며 수구파를 제거하려고 당시 20대의 소장 지식인들이 일으킨 혁명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은 정변의 실패로 죽음을 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정작 그 후에 나라는 개화파가 염원한 대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세속 정치가들의 야심적인 정변은 실패했지만, 수구파의 거두로 지목된 민영익은 엉뚱하게도 서양 의사 알렌에 의해 생명을 구했다.

정변이 실패하여 영의정의 아들 홍영식은 참살 당했으나, 정작 그의 집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개조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영식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서양식 병원이었다. 또 당시 현장에서 개화파의 일원으로 정변에 참여하여 사관생도를 지휘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났다고 평가되지만, “갑신정변”은 결과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제중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건립과 최초의 의사 서재필의 배출로 이어졌던 것이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에서 서양 의학, 특히 외과 의술에 대한 조선인의 호응을 확인한 알렌은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을 통해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설립을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2월 25일 왕의 호의로 알렌은 병원 설립안을 허락받았는데, 질병 치료뿐 아니라 한국인 의료진 양성계획을 첨가했다. 알렌은 해외 선교의 원칙대로 의료와 교육을 앞세웠고, 한국인 의료진 양성이야 말로 의료 선교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크게 감동을 받은 고종의 윤허로 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어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재동(현 헌법재판소 구내)에서 개원하였다. 40개의 병상이 갖춰졌고, 첫 해에 10,000명이 치료를 받았다. 제중원의 개원은 조선 근대사의 중대한 한 장면이었다. 

이미 가우처 목사는 1883년에 미국을 방문하던 민영익을 만났을 때에, 조선 실정을 상세히 듣고 조선 선교가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그는 기부금 2천 달러와 함께, 확신에 찬 편지를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보냈다. “조선 땅은 선교 개척지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큰 지장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은거의 나라로 뻗쳐서 그곳 조선의 선교사업을 수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선교본부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음해 1884년 1월 재일본 감리교 선교회의 대표자인 맥클레이 목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일하고 계신 일본은 조선 땅과 가까우니 조선을 직접 찾아가서 실제 답사를 한 후에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은 편지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일본에서 개화파 김옥균을 만나 조선입국을 추진하게 된다. “잠에서 깨울 수 있는 건 교육뿐이다”는 그의 설득에는 나라사랑이 어우러져 있었으므로 이 계획은 추진되어 간다. 맥클래이 부부는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한 후에 청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감리교회 본부로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선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궁극의 목적인 전도를 굳이 감추어 가면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은 학교개설을 대환영했고 의료사업은 절박하고도 시급한 형편입니다.”이자, 의학사, 교회사, 교육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다. 

알렌의 원래 의도는 병원과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함께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학교가 추가로 생기고, 이곳에서는 해부학을 비롯해 생물, 화학 등 의학과 관련된 기초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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