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종 문 목사
원 종 문 목사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 하리로다”

세계적인 발레교사인 빌헬름 브르만은 “<일>은 인생을 감미롭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힘겨운 짐이 아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노동>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우리 옛말에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의 가치와 인식은 기술적(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인식론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노동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인식이 달라진다. 아쉽게도 노동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구약성서가 갖고 있는 노동관을 살펴보면, 그런 인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경제학자인 아담스미스마저도 노동(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지상의 삶이 천상의 삶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성서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면, 노동의 가치와 인식에 대한 인간의 불합리한 관행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에 대한 다른 반작용이 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세상 경영방식이다. 구약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노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일터인 땅 또한 노동자와 뗄 수 없는 본질적인 파트너 관계이다. 안식일은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언서에서는 무엇보다 ‘공의와 정의’라는 원칙이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문서는 ‘여호와 경외’라는 원칙이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의 핵심요소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 노동자, 일터, 그리고 노동과 시간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재발견 할 수 있다. 즉 노동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경외의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6일동안 일하시고, 7일째 되는날 안식하셨다. 구약성서의 안식일은 식객 뿐만 아니라 짐승까지 쉬도록 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어머니는 길삼해서 가족들에게 옷을 입히고, 아버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산업사회가 뿌리를 내리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노동의 가치를 종속시켜 버렸다. 부산 감천마을에 배달의 신, 일명 ‘날다람쥐’ 오광봉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다. 현재 88세인 할아버지는 83세의 연세까지 새벽에 신문배달을 36년을 넘게 하셨다. 젊은이들도 숨 가쁘게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린다고 해서 동네 주민들은 할아버지에게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가내수공업을 하다가 그만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 오른손은 4개 손가락은 없고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비관하여 자살까지 생각했다. <노동>은 해야 하는데 손의 장애 때문에 직장에서 받아주질 않았다. 직장도 구하지 못했다, 그러다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보자고 한게 신문 배달이었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정말 힘들고 고된 36년이 넘은 시간들을 보냈다.

노동은 하나님이 준 축복이다. <노동>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건강해야 하고, 둘째)<노동>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 받아주는 일터, 즉 <노동>할 기회가 있 어야 한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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