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알렌의 원래 의도는 병원과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함께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학교가 추가로 생기고, 이곳에서는 해부학을 비롯해 생물, 화학 등 의학과 관련된 기초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한글로 서양 의학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교과서도 역시 한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학생들은 영어부터 배워야 했다. 한글로 배워도 쉽지 않은데 낯선 언어로 의학 공부를 하니 어려운 것은 당연하였다.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의학교 첫 번째 기수에서 의사가 된 사람은 없었고, 제중원 운영에 대한 선교사측과 조선정부의 의견이 달라 이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제중원은 선교사들이 알아서 운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알렌은 이후 세브란스라는 자선가의 도움을 얻어 남산 복숭아골에 “세브란스 병원”을 지었다. 제중원에서 세브란스로 바뀌었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인상을 깊이 서울 시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의사로서 알렌은 매우 균형잡힌 안목을 갖추고 활약한 외교관이자 평신도 선교사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구한말 선교는 의료사업과 교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거부반응을 줄이면서도 엄청난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낯선 외국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존경과 경외심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병원을 통해서 퍼져나간 서양인들에 대한 소문은 서울 장안에서 전국으로 흩어져 나갔다. 당시 조선인들의 의식수준과 질병에 대한 이해는 한마디로 “귀신숭배”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의 질병체계를 귀령신앙으로 간주하고, 조선의 ‘미신성’과 ‘주술성’ 타파에 주력한 의료선교사들이 선교의료를 대중적으로 펼치고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강구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힌 장벽은 당시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던 질병 관념과 
종교적 질병관이 선교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는 너무 상이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공통적으로 조선인들의 ‘귀령신앙’을 크게 주목하였다. 

당시에 조선인들은 천연두에 걸려서 거의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무서운 질병을 귀신의 작용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악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쫒아내고자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다. 다른 모든 선교사들도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너무나 절망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는 천연두가 발생하자 왕실에서는 거대한 굿판을 벌려서 해결하려고 했음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웠다.      

두창(痘瘡)이라고도 하는 “천연두”는 한반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1886년에 발행된 제중원 “일차년 의료선교사업보고” (The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에는 당시 유행병이 어떤 상태였는가를 알 수 있다. 두창을 겪지 않은 조선인은 거의 없으며, 2세 이전에 20%, 2-4세 사이에 20%가 사망하여, 4세 이전에 40~50%의 조선인이 천연두로 사망한다고 기록하였다.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소에 온 여인 중, 슬하의 11명의 아이가 모두 천연두 때문에 사망했던 사례가 보고될 정도였다. 20세기 초반까지 천연두는 한국인에게는 공포의 질병이었다. 1908년 이뤄진 통감부 조사에 의하면, 6종의 급성전염병 (천연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디프테리아) 중 천연두는 환자 1,443명, 사망 337명으로 전체 급성전염병 사망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