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9월 2일 주일 예배를 드리며, 어재의 날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 朝鮮人 虐殺事件, 간단히 간토 대학살)은 간토 대지진(1923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대대적인 학살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1] 혹은 6,600명[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만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조선인은 그들에게 무엇이었단 말인가?

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운동과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규모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진 당시, 치안을 맡은 최고 책임자들은 주로 대만 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 및 군인 출신이었다. 또한 일본 본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일본제국의 위기으로 판단한 이들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을 기화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하였다.[3] 사건 이후, 일본 당국은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에서 다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동안 일본 내 조선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한 초기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 사상자의 수는 불과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일본 정부는 사건을 숨기는데 급급하였다.

이는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 한일합방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라고 불리 우는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강제로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에 의해.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데서 온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 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 하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복 76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자신 배만 위하여 또다시 참담한 비극의 역사가 대한민국에 재현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갖는 정치인, 언론인, 공직자, 각 분야의 지도자, 특히 그리스도인 등이 있다면 어찌되겠는가? 일부 언론, 정치인, 학 등을 보자면 꼭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될 정도로 정부의 정책이나 일 등에 온갖 비난만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므로 나라를 잃거나, 굴욕적 고통의 역사를 잊는 민족은 다시 비극을 불러올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생각을 기대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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