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그런데 당시 조선인들은 콜레라가 쥐 귀신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해서, 도성 곳곳에 고양이 그림이나 새끼줄을 붙이거나 고양이 시체를 부적으로 설치했었다. 백성들의 무지함과 두려움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정황을 만들었다. 미신에 속아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던 시기에 알렌과 헤론, 에비슨 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결국 이러한 의료 선교사역의 효과를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서양 선교사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들어와서 복을 전하게 될 때에는 서울 장안에서는 거부반응이 많이 상쇄되었다. 의료선교 사역은 예수를 믿기로 준비된 사람들을 만들어놓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서울 장안에 널리 퍼져나간 알렌의 의료사역은 다음에 들어오는 후속 선교사들의 기초가 되었다. 알렌이 고종과 민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서 높은 관직에 올라 성공적인 사역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이 설립된 이후로는 동료 의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이 심해져서 3년 후에는 순수한 외교관으로서만 활동했다. 제중원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이었으나, 동료였던 헤론과의 의견 차이로 갈등이 심했고, 훗날 언더우드와 헤론이 서로 갈라섰다. 그 후로는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1887년에는 미국 주재 한국 선교부를 수행하여 워싱턴 디씨에 갔다. 1890년에는 서울주재 재한 미국 대사관의 서기관이 되었고, 1897년에는 공사로 승진하여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어서 매우 긴밀하게 지냈으며, 한국에 최초 전기회사와 수도회사, 전동차와 철도체계의 설립을 도왔다. 

알렌의 외교적 역할은 점차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가츠라 태프트 조약”을 일본과 체결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렌은 1905년에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제동을 걸고자 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이권쟁탈전에서 그의 견해는 무시를 당했다. 공사의 직책에서 물러난 후, 알렌은 미국에 귀국해서도 의사로서 활동하다가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주, 톨리도에서 사망하였다. 21년간 한반도에 머무는 동안에, 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내 프란세스 앤과의 사이에 2남, 호레이스 에단과 마우리스를 두었다 (Horace Ethan and Maurice). 

10.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열매들
      
알렌의 헌신으로 문을 열게 된 한반도에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복음사역의 토대가 되는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통해서 젊은이들을 지성인으로 배출해내는 혁혁한 공헌을 남겼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1880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에 있는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하던 시기에 “전국신학교 연합회”가 창립되어서, 프린스턴 신학교, 하트포트 신학교 등에서 큰 대회가 열렸는데, 이 모임을 통해서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83년 신학생들의 모임에서 알버트 울트만스 박사가, “누가 조선에 복음을 들고 갈 것인가?”라는 도전을 듣고서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문호를 열렸고, 주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호소를 접하게 되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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