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용서하다’의 히브리어 ‘나싸’(נשׂא)는 ‘들다, 짊어지다, 옮기다, 제거하다’ 등을 뜻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길게 소개하는 출애굽기 34장에도 ‘용서’가 자비의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출 34:7).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자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두 차례 ‘아나 싸 나’ 용서를 구한다(창 50:17). 머리는 숙이고 허리를 낮춘 채 두 손을 바닥에 대는 자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태도다. 구약의 용서 ‘대신 짊어지다’는 ‘친구란 대신 짐을 져주는 사람, 용서하면 친구가 된다’는 인디언 속담과 상통한다. 

한자 용서(容恕)는 본래 한 글자 ‘서’(恕)로 표현되었다.<논어 위령공편> 용서할 ‘서’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결합된 회의(會意) 문자다.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의 forgive를 번역하면서 기존의 ‘서’ 앞에 얼굴 ‘용’(容)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새긴 것이다. 이때 얼굴은 face to face, 맞대면하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용’은 얼굴을 마주한 상태이고 ‘서’는 나와 상대의 마음높이를 같게 하려는 의지다. 얼굴과 마음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서로의 ‘마음’(心)을 ‘같아지게’(如) 하려는 일련의 진지한 의지와 노력이 포함된다. 따라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의 키가 같아질 때까지 온갖 역동이 일어난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을 대면했을 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개를 숙인 채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요셉은 얼굴을 마주하며 두려워말라고 말한다. 그러니 진심으로 상대를 살피지 않으면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어렵다. 요셉의 용서와 형들의 화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다.

아미시는 재세례파의 하나로서 독특한 신앙 집단이다. 이들의 신앙에서 용서는 가장 큰 덕목이다. ‘용서는 진정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미시의 증언이다. 아미시의 용서는 지난 2006년 10월 니켈마인스의 아미시 마을의 총격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충격과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아미시 지도자들은 살인자의 가족을 찾아 범인이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용서를 하다니? 그러나 용서했다고 그 선언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지 않는다. 용서 후에도 추슬러야 할 일이 기다린다. 우선 심리적인 고통을 껴안고 가해자를 안타깝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내면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친다. 베드로는 스승의 의중을 헤아린 듯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쯤 용서하면 되겠지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마 18:22. cf. 눅 17:4). 예수의 말씀은 아마도 용서 후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아있는 복수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고 또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한 바 있다. 그러나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이 변심하여 복수할까 두려워 아버지의 유훈을 상기시키며 다시금 용서를 비는 것이다. 

형들의 태도는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교훈은 용서를 베푸는 자의 태도를 제시한다. ‘아나 싸 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며 정중하게 용서를 비는 말이다. 예수의 교훈은 ‘일곱 번이나 일흔 번’이라는 숫자에 방점이 있지 않고 완전하게 ‘통째로 선물(pardon)로 주라’(forgive)는 요구이다. 이렇듯 얼굴을 서로 마주하니 마음이 열리고 둘 사이에는 마음의 키가 똑같아지는 감동의 울림이 일어난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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