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종 문 목사
원 종 문 목사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타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 정치구조, 경제구조를 타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공동체운동도 굴절될 수밖에 없었고,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는 계속되어 왔다. 성서 베드후서 2장13절 이하와 유다서12절은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공동체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진정한 화해와 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신대학교 전 교수 박재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공동식사와 해방의 경험(정의·평화·기쁨)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사에서는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기쁨이다-로마서 14장 17절, 이들은 다시 물질과 정신 이원론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예수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내적으로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의해, 외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의해 이중적인 제약을 받았다. 바울은 팔레스티나의 사회분화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엘레니즘 세계로 침투하기 위해 예수님의 공동체운동을 정상화 또는 추상화 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시대 예수님의 공동체운동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로마의 박해를 받는 동안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교회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후 교회는 국가를 대신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역할을 했다. 긍휼을 베풀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받아드리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로마교회가 크게 성장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한국 역시 초기교회는 간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고, 교육을 실시했으며, 양성평등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신분적으로 소외당했던 민중들이 교회로 몰려와 빠르게 성장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해서 성장되어 왔다. 감독제도가 확립된 이후 교황 심플리키우스는 465년부터 교회수입의 1/4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도록 규정했다. 빈민층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 행위를 철저히 반대했다. 귀족들의 저항을 받았다. 여기에 맞서 투쟁한 단체가 바로 교회였다. 538년 제3차 오클레앙 종교회의는 “성직자는 물론이고 모든 집사에 이르기까지 고리대금업을 못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또한 착취하는 사업도 금지했다. 7세기 교회법도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다. 교회의 영향력은 날로 성장될 수 밖에 없었다. 게르만 국가들도 교회법을 추종하며, 이를 토대로 시민법을 만들었다. 7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당시의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까운 교회였다. 점차 교회가 부를 축적하고, 주교는 봉건영주와 같은 존재가 되면서, 교회는 반민중적인 교회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것은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들 중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교회는 꾸준히 성장해 왔고, 성장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길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바로 삶의 현장이었다. 이 곳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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