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 강 목사
오 수 강 목사

본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초로 세워진 구원의 방주다. 구약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심판 내용 중에 인류와 삼라만상의 생명을 멸하실 때 창조의 근원인 생명과 종족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의 생명 유전을 위한 홍수 기간 내내 견딜 만한 방주를 짓게 했다. 문제는 방주는 하나만 짓게 하셨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하나만 만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방주가 하나인 것에 대한 의미를 신약의 교회에 대한 개념과 병치하여 생각해야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신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분명 교회도 하나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갈라져 선교와 전도에 지장을 주는지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정치인들은 계열과 파당을 만들어 자파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계속해서 파당 정치를 감행한다. 마치 교회도 세속정치 파당을 차입해 우후죽순처럼 교파나 교단을 창설해 교회 운영의 주도권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애를 쓰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교회 운영에 세속의 권모술수와 정치적인 파당 행위가 도입되어 세속적인 모습으로 탈바꿈 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래 교회가 지녀야 할 신령함과 경건함은 실종되고 온통 세속의 정치와 인본주의 적인 색체만 난무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는 다행스럽게 특정한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교회를 운영하는 분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고 작은 교회의 롤 모델이 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찢어지고 갈라진 교단이나 교파에 속한 교회를 후 세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애석함도 있다. 지금 교회의 모든 것은 현재 소유한 세대들의 것이 아니라 미래에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가야 할 젊은 세대들의 것이다. 아무리 크고 잘 지어진 교회 부동산과 수 많은   신자들을 물려 준다고 할지라도 진리가 하나로 통일된 교회가 아닐 때에 오는 상실감을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일제 식민 치하와 한국전쟁, 그리고 사일 구와  오일육을 거치면서 오일팔 민주화라는 사회적인 일련의 정치적인 환경 속에서 굳건히 신앙과 믿음을 지켜 왔다. 더더욱 정치적인 격변을 겪으면서 일부는 사회 정치에 휘둘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신앙인들은 기독교 고유의 신앙을 지켜 온 사실은 미래 세대에게 주는 멋진 유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에 옥에 티라고 할 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파나 교단으로 갈라졌다는 현상이다. 그리고 교단의 연합 조직이 때로는 사회 정치에 휩쓸려 교회 신앙의 순수성을 뒤로하고 지도자 개인의 위상과 정치적인 명예에 치중하는 모습은 종교 지도들이 가야 하는 신앙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태껏 교단의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 사회에서도 배척하는 선거 부조리 현상인 금권과 흑색선전이 신령한 목회자들에게 유입되어 신자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9월은 또한 교파 정치 일정상 교단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발 교회 목회자들은 종교성과 신령함을 잊지 말기를 진심으로 부탁 올린다. 목회자의 거룩한 성의를 입고 가장 신령함을 외치는 자들에게서 이중인격이라 비방 받지 않도록 하자. 자라나는 세대는 욕하면서 좋지 못한 행동을 그대로 닮는다고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옛 속담이 이행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만이 진리고 타 교단이나 교회는 비 진리라는 흑색선전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내 교회만 크고 부흥되면 그만이지 작은 교회 타 교회야 부흥이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모리배적인 생각은 버렸으면 한다. 이제는 다 같이 살지 못하면 다 같이 폐교할 수도 있다. 교파나 교단이 중용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성경의 진리대로 가르치고 믿고 신앙하여 거듭나 영혼이 구원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교계에는 흠모할만한 지도자 즉 어른이 부재다. 교회가 크고 신도 수만 많으면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는 독불장군들은 더러 있다.

대학 평가에서 국가보조금 대상에서 탈락한 신학대학이 많이 나왔다. 문제는 억울함을 표출하기 전 왜 평가에서 탈락되었는지 면밀하게 살펴 기준에 충족하기 위해 노력은 하지 않고 억울하다고만 하는 소리다. 현재 추세로 보면 신학대학이 예전처럼 외부로부터 지원이 부족해 운영에 문제가 있자 신학교 고유의 신앙의 본질을 세우기보다는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해 세속적인 과를 증설해 신학교인지 아니면 일반 대학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 크다. 지금의 신학대학이 후대 물려 줄 유산으로 적합한지 중세 수도원은 아닐지라도 신학의 본질을 세웠으면 한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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